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박정희 전 대통령(4)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박정희 전 대통령(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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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8.2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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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애칭 없고 파티나 골프 안 좋아한 색다른 장군’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은)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편향성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건강 노년, 문화노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세번째로 박정희 전대통령 편을 연속 게재합니다.  

<기획 취재팀〉


 

가난, 가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입에 달고 살았다. 보좌한 수많은 측근들이 가난하게 살던 옛날이야기를 듣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가난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자랑이 아니라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가난추방을 일생의 사명으로 타고났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고 한다.


고건 전 총리는 박대통령 정권 후반 청와대 수석비서관 시절에 겪은 일화를 다음과 같이 어느 글에 기고한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구미 상모리에 대농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지주집에서 모내기를 할 때면 온 동네 사람이 모두가 품앗이를 했다 한다.

 

이때 마을 아이들과 함께 박 대통령도 따라가곤 했었는데 그때 지주 집에서 주던 밥과 반찬 맛이 어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호박잎에 얹혀진 ‘자반고등어’ 한토막이 그렇게 맛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통령이 마음속에 간직한 가난한 시절에 대한 한과 어떻게 해서든 가난을 극복하려는 무서운 집념이 상대적으로 안녕하게 성장한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오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무렵 부쩍 외로움을 탔던지 비서관들과 1주일에 한 번 정도씩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때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때 개발한 비주(秘酒)를 한잔씩 돌리기도 했다고 한다.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라 막걸리 한 주전자에 맥주 한 병을 섞는 ‘비탁’ 칵테일이었다. 돈이 없어서 ‘비루(beer:맥주의 일본식 영어 표현)를 못 마시던 교사들이 막걸리 한 말에 맥주 두어 병을 부어 함께 돌려 마시곤 했다는 것이다. 비어+탁주=비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의 ‘가난한 시절의 한’과 ‘무서운 가난 극복의 집념’은 다시 생각해볼만 하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16강 8강에 올려놓으면서도 ‘아직도 승리가 배고프다’고 했던 히딩크 감독처럼 고도경제성장을 구가하면서도 경제발전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가난이라는 말을 너무 오래 하다 습관이 되어버린 것일까. 물론 전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3·15 부정선거 요구 거부한 장군

 

197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는 냉랭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카터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1976년 이후 주요 수출산업을 국내기업이 주도하도록 정책을 취하면서 외국자본의 대한투자와 생산도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으로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대한 일말의 우려가 없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묵고 무서운 가난 추방의 집념이 젊은 시절에는 없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당연하다.


2회에서 살펴보았듯이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있던 1950년대 후반 언론계와 군의 뜻 있는 지인들과 만나면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에 대한 의기를 가끔 드러내곤 했다. 그러던 시기에 군수사령관 박정희 장군도 자유당 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되는 3·15부정선거 상황을 맞게 된다. 군 정보부대의 박모 대령이 박정희 장군을 찾아와 부정선거를 강요하다시피 했다.


박정희 장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난 그런 짓을 못해! 부하들을 감독해야 할 내가 어떻게 부정을 시킨다는 말인가 ”라고 하고 책상위의 투표용지를 북북 찢어버렸다. 당시 군에서 부정선거에 호응하지 않았던 장군은 이종찬 육군대학총장과 박정희 대통령 두 사람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만큼 정신이 깨끗하고 건강했다는 반증이다. 그로부터 1년이 약간 지난 1961년 5월 16일, 그런 의기로 결국 군사행동을 감행하여 권력을 장악하는데, 이때의 거사 동기에 대한 분석이 엇갈리고 있다.

 

거사 무렵 소장 예편 대상자로 내정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주저없이 일어섰다는 설도 있고, 극심한 사회혼란을 방치할 수 없어 구국의 일념으로 일어섰다는 주장도 있다.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로부터 18년쯤 후 고건 전총리가 발견하는 한과, 무서운 집념보다는 40대 혁명주역이던 그때가 더 집념이 강했으리라는 것이다.

 

미국에 떳떳한 대통령

 

역사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때 5·16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 10대 교역국이 될 수 있었을까  역시 하나마나한 물음이다. 진행된 역사적 사실만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국가 지도자들의 건강한 정신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선의는 함께 돌아보기 아름다운 역사이다. 반성과 비판과 평가도 그것대로 역사이므로 따로 이야기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5·16 직후 미국측이 본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인적사항이 재미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미국의 영향력이 커서 흔히 ‘통역정치 시절’이라고도 하는데, ‘박정희의 시대’를 쓴 하야시 다케히코는 미국측 기록을 인용하며 그때 박정희 장군은 영어도 쓰려고 하지 않았으며, 미국식 애칭도 없었다고 했다. 또 파티 참석도 좋아하지 않고 골프도 치지 않았던 아주 색다르기만 한 장군이었다고도 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도층 사교계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소외돼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단서다. 나이는 한참 위인데 동기나 후배들보다 계급이 낮은 것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옷을 벗었던 전력도 소외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야시 다케이코는 “1961년 7월 5일 미국무성에 제출된 서울 미국대사관의 ‘쿠데타세력에 대한 1차분석보고서’는 박정희 장군의 사상 경력에 대해서 해방 후 2년간 공산주의자였다고 하면서도 현재는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보증하고 있었다”고 기록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전력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5·16 직후 ‘부정축재자 재산 환수’, ‘국가경제발전5개년계획’ 등 일련의 계획경제 정책을 제시했을 때도 미국으로서는 우려스러웠을 수 있다. 그것 때문인지, 박정희 대통령의 성격 탓인지 집권 기간 내내 한미 두 나라는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냉온 관계는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이 있는데,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60년대와 70년대 고도경제성장을 했던 것도 그런 냉온이 교차하는 한미관계 때문이었으리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미국 당국이나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다국적 자본들은 자신들의 무전 이익을 향해서만 촉수를 뻗는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선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의 안방, 혹은 잡아놓은 고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수많은 남미 친미정권 나라들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오직 한국과 대만만이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베트남전과 중동 특수로 한국의 경제발전이 성공한 것은 틀림이 없다. 또 공산주의와 대치한 최전방 자본주의 국가로서 성공한 모델(model)로 육성될 필요가 있어서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에게 신세진 것이 별로 없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이 한미관계에서 당당했던 것이 우리 경제발전에 결정적이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책잡히지 않을 만큼 검소하게 살면서 국가경제발전을 추구했던 것이 외치의 큰 힘이 되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렬씨는 “청와대에서는 항상 보리와 쌀을 7:3 비율로 섞은 혼합식을 먹었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까지 그렇게 식사했다. 점심은 멸치 국물에 비빔국수를 즐겨 드셨다”고 회고하고 있다.

 

혼식 분식 이야기나 자녀들의 도시락 얘기는 측근들이 남긴 여러 회고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흔히 회고란 미담으로 남는 예가 종종 있어서 100%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러한 정신이 강조되었던 것은 사실인 듯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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