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노인복지센터·원각사·종묘공원 현지르포
서울노인복지센터·원각사·종묘공원 현지르포
  • super
  • 승인 2006.08.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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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급식 기다리는 것도 소일거리지…”
가정의 달 5월. 사회복지관을 비롯해 상설 무료급식소에 길게 줄지어 선 노인들의 기다림은 오늘날 우리 노인복지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한 끼 식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의 눈총을 피해, 감옥소 같은 집안에서 우두커니 앉아있기 뭣해 무료급식소를 찾는다”고 입을 모았다. 약속도 없이, 딱히 만날 이도 없이 무료급식소와 공원으로 어르신들이 모여들고 있다.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긴 줄에 들어서 1시간 넘게 기다리는 일도 대다수 노인들에게는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버이날 다음 날인 지난 5월 9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경운동 ‘서울노인복지센터’ 본관 출입문 주변은 삼삼오오 짝을 이룬 노인들로 북적거렸다.

 

더러는 홀로 담배를 태우거나 초점 없는 눈빛으로 지나는 행인을 바라보는 어르신도 눈에 띄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앞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어르신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노인들의 행렬이 눈에 띄었다. 식당 안은 단 하나의 빈자리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찼고, 배식을 받는 어르신들도 긴 줄을 잇고 있었다. 하루 2000여명의 어르신들이 점심 무료급식을 이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았던 터였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2층 계단으로 이어진 줄이 보였다. 줄을 따라 올라갔다.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진 줄은 3층 계단까지 이어졌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3층에 올라서자 실타래처럼 얽힌 세 겹의 줄이 또 이어지고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 아니었다. 3층 한 켠에 마련된 대형 텔레비전 앞에는 50여명의 어르신들이 의자에 앉아 오후 1시부터 시작될 ‘2부 급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어르신들을 포함, 1층부터 3층까지 어림잡아 1000여명은 될 듯했다.


출입문 앞에서 만난 김인섭(78)씨는 경기도 부천시에서 왔다고 했다. 매일 오전 8시30분이면 어김없이 전철을 타고 서울노인복지센터에 ‘출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10시쯤이면 여기 오지. 도착하면 우선 무료급식 번호표를 받고 친구들을 찾아. 한 예닐곱 돼. 그렇다고 매일 그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아니고…, 사정이 있으면 안 나오는 친구들도 있으니까. 한둘이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하다보면 급식이 시작되거든. 밥 먹고…, 뭐 할일 있나, 저 앞 탑골이나 종묘공원이나 가야지.”
김인섭씨는 마흔 둘 된 아들과 마흔 한 살의 딸이 있다고 했다.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지만 낮 시간은 어김없이 종로에서 보낸다고 했다.
“집에 있으면 뭐해, 감옥살이지. 며느리 눈치 보는 것도 싫고. 아, 얼마나 좋아. 여기 오면 친구도 만나고, 매일 바뀌는 반찬에다 푸짐하게 한 상 받는데(웃음). 집에 있어봐, 매일 된장국에 김치야.”
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옆에 있던 어르신이 한마디 거든다.
“아무렴. 애들이 그러잖어, 노인네들이 집구석이 앉아 있으면 잘 될 집도 망한다고. 나쁜 놈들, 지들 때문에 이 나이 먹도록 여행한번 못했는데…. 아들자식도 소용없어. 그래도 여기 오면 그 놈들 눈치 안보고 하루 지낼 수 있거든.” 일흔 둘이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고 나이만 일러준 어르신은 아들만 셋이라고 했다. “세 아들 모두 지 밥벌이는 하고 있다”고 했지만 “누구 하나 용돈 주는 놈이 없다”고 했다. 그는 “나라에서 매달 1만2000원씩 주는 교통비가 유일한 수입”이라고 하소연했다.
길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지강현(69)씨는 “뭐 그런 걸 물어보냐”면서도 “종로에는 세상 구경하러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무료급식을 자주 이용하시느냐”고 묻자 “밥이 아니라 세상 구경하러온다니까!”라며 너털웃음을 건넸다. 지강현씨는 ‘무료급식은 돈 없는 어르신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수단’이라는 편견에 일침을 놓았다.
“젊은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네. 밥이야 어딜 가도 먹지, 더러는 돈 없어 여기 오는 노인네들도 있지만. 시간 보내러 오는 거야. 여기서는 누구나 할 것 없어 같은 처지거든. 아무나 잡고 물어봐, 배고파서 오는 사람 많지 않아.”
지강현씨의 말을 듣고 보니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긴 줄에 끼어 있던 어르신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목적이 무엇이든 기다림은 지루한 법. 그렇게 긴 줄에 들어있으면서도 짜증을 내거나 재촉하는 어르신은 단 한명도 없었다.

 

운현궁 아래, 탑골공원 뒤편에 자리한 또 다른 무료급식소 ‘원각사’에서 만난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였다. 1993년부터 노인을 상대로 무료급식을 하고 있는 원각사에는 하루 150여명의 어르신들이 찾고 있다.

 

이곳에서도 번호표를 손에 쥔 채 차례를 기다리던 어르신들의 표정은 느긋했다.

 

“원각사 점심을 한 이 년째 먹고 있다”는 박상용(가명·71)씨는 “할일 없는 노인네들이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는 것도 소일거리”라고 잘라 말했다.

 

박씨의 친구라고만 소개한 다른 어르신은 “좀 기다려야 밥이 맛있지, 공짜 밥 먹으면서 빨리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수 있나”라며 허허 웃었다.


이정기(가명·75)씨는 “집에서 하루 종일 시간보내기가 쉽나. 할 일 없으니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밥 먹고 하루 보내는 것이지”라며 무료급식을 이용하는 이유를 밝혔다.
원각사 주지 보리스님은 “탑골공원이 사적지로 재정비되기 전에는 한 500명쯤 찾아 오셨는데 이제는 어르신들의 주무대가 종묘공원으로 바뀐 데다 그곳에서도 무료급식을 하기 때문에 150~200여분이 찾아 오신다”고 했다.


무료급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어르신들이 약속이나 한 듯 발걸음을 옮기는 곳이 종묘공원이었다. 어르신들을 따라 원각사에서 10분쯤 걸어 종묘공원에 도착했다. 그 넓은 공원에 앉을 자리 한 군데 남김없이 어르신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종묘공원 입구에서 10년째 샌드위치를 팔고 있다는 김숙이(61)씨는 “무료급식이 모두 끝나는 오후 2시 이후 어르신들이 가장 많다”고 귀뜸했다. 그는 “지하철이 닿는 곳이라면 수도권 어디서라도 오시기 때문에 종묘공원에 어르신들이 많다”며 “마땅히 갈 곳 없는 어르신들이 전철 타고 모이기 좋은 곳이 종묘공원”이라고 덧붙였다.


물끄러미 기자를 바라보던 한 어르신은 “뭐 하러 왔냐”고 말을 건 뒤 내친 김에 말동무를 삼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름과 나이를 밝히기 꺼린 어르신은 “여기(종묘공원)가 넓은 세상”이라며 “사람도 보고 바람도 쐬고, 여기만큼 시간보내기 좋은 곳도 없다”며 ‘공원 예찬론’을 폈다.
무료급식소와 공원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정부가 뭐 하는 게 있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고령화시대라며 갖가지 노인복지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어르신들은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하나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무료급식은 하루하루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의 단상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노인복지센터 홍보실 송화진 팀장은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매일 바꾸기 어려운 식단이나 같이 먹는 즐거움 등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무료급식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 팀장은 또 “어르신들의 무료급식은 식사의 개념보다 일상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장한형 기자 janga@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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