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김수환 추기경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1.05 14:05
  • 호수 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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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쓰는 신인물사 [2]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리고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리고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농성학생들은 그 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이고…

김수환 추기경은 매년 명동성당에서 성탄전야 미사를 집전했다. 1971년 성탄절 때 TV로 전국에 생중계 방송된 미사 강론에서 추기경은 옷소매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 연장 의도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정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권력이 있는데 그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추기경은 그날 밤 작심한 듯 말했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청와대 역시 발칵 뒤집혔다. 마침 이 중계를 보던 박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 방송 중지를 명령했지만 카메라 PD 등 제작요원들은 별 생각 없이 성당 건너편 골목 술집에서 한 잔 걸치고 있었다. 결국 추기경이 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전국에 생방송되고 말았다.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수습에 육영수 여사가 나섰다. ‘청와대의 야당’이라는 육 여사는 일종의 중재안을 냈다.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김 추기경을 함께 모시고 가는 방안이었다. 대통령 특별기동차로 무려 7시간 동안 마주 앉아 달리는 동안 주로 박 대통령이 국정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줄기차게 말했고, 추기경은 줄곧 듣기만 했다.

추기경은 후에 이날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박 대통령은 나라를 꽤 사랑한 분이었어.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지도자였고, 그래서 ‘우리도 하면 된다’라고 굳게 믿고 밀어붙였던 지도자였고 그 때문에 반발하는 양심세력과는 늘 부딪쳤지…. 우리가 서울을 떠나 대전을 거쳐 경북 김천역을 막 지났을 때 대통령은 수행한 비서실장에게 ‘철도청장이 여기 타고 있느냐’고 느닷없이 물은 거야. 이후락 실장이 청장 대신 철도청 차장이 타고 있다고 하니까 좀 오라는 거야. 그래서 헐레벌떡 차장이 달려오자 ‘이봐, 임자, 조금 전에 지나친 역사 옆에 큰 나무 쓰러져 있는 걸 봤나’ 하고 물었다. 당황한 차장이 ‘미처 못 봤습니다’고 하니까 대통령이 ‘역장에게 연락해서 쓰러진 나무 잘 일으켜 세우라고 해’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순간적으로 ‘아하, 이 사람이 너무 나라를 사랑하는 걸 보니까 잘못하면 독재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

박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김 추기경에게 정치에 너무 개입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교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추기경은 언제나 하느님 뜻에 따라 정의로운 편에 섰다. 

6‧10 항쟁 주동학생 보호 

김수환 추기경은 여러 종교지도자 가운데서도 사회적 신망이 두터운 분이었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천주교 한민족돕기 회장과 나환우촌 라자로돕기회 회장으로 지내면서 명예총재인 추기경을 새롭게 만나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민주화의 진통을 혹독하게 치르던 1970년대 말 명동대성당에 우뚝 선 저항의 선봉장이었다. 모든 국민이 그의 단호한 예언의 외침 속에서 안전지대를 찾았다. 1987년 6‧10 항쟁 때 명동대성당 구역 안에서 농성 중인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찾아온 이는 가톨릭신자였던 이상연 내무부장관이었다. 그때 추기경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리고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리고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농성학생들은 그 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이고….”

공안 책임자였던 이 장관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전투경찰 투입이 불가능함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농성은 나중에 쓰러진 학생을 긴급 후송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성모병원 앰뷸런스를 불러 들여 주교관 안에서 주동학생들을 차에 태운 후 사이렌을 불며 경비경찰 저지선을 뚫고 나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2005년 4월, 바티칸에서 엄수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식에 우리 정부 공식 조문사절로 내가 참석했을 때 우리나라의 김 추기경이 나중에 베네딕트 16세 교황이 되신 당시 교황청 국무장관 라칭거 추기경과 둘이서 그 엄숙한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진행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남몰래 눈물까지 흘렸다. 그 전날까지 김 추기경은 소화불량, 피로, 설사로 밤잠을 제대로 못 자고 고생했다. 아침결에 찾아온 독일계 여의사가 농담을 했다.

“추기경님,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하고는 절친한 사이 아닙니까? 뭐 좀 아프다고 저 같은 의사를 부르세요. 저 베드로 광장에서 울려퍼지는 함성 안 들리세요. 아마 지금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인품에 올라가셨을 테니 친구 분인 그 교황님께 한 마디 부탁만 하시면 이런 별것도 아닌 병은 금방 치유될 텐데….”

그 말에 김수환 추기경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날 장례절차는 아주 엄숙하고 깔끔하게 잘 치러졌다. 나는 우리 추기경이 그렇게 높은 분인 줄 몰랐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나중에 교황 품을 계승한 베네딕트 16세와 함께 추기경 서열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추기경 가운데 두 번째인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황우석 사기극’에 눈물 

김수환 추기경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광산 김씨 보현의 손자로 19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동경 조치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1944년 중도 귀국해 1951년 가톨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동성상고 재학 시절 ‘천황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 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시험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이에 당시 교장이던 장면은 노발대발하며 따귀를 때렸다. 장면의 이런 반응은 아직 나이 어린 김수환 학생이 일본인과 일본 경찰에게 해코지와 탄압을 받을까 우려해 보여주기 식으로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장면은 나중에 김수환이 일본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던 독일인 신부에게 감명 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1951년 사제로 서품된 뒤 대구대교구 안동본당 주임을 지냈고 독일 유학을 다녀와 1966년 주교에 올라 마산교구장이, 1968년 대주교로 승품돼 서울대교구장이 됐다. 그리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에 올랐다. 가톨릭 역사에서 드물게 보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말년의 추기경에게는 더 이상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었다. 오직 대한민국만 있었고 대한국인만 있었다. 황모 박사의 줄기세포 연출극이 온 세계에 폭로됐을 때 그는 울었다. 명색이 고명하다는 교수가 자신을 속인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연구 성과로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던 전 세계인을 속인 사실에 흘린 연민의 눈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2008년 말기암에 걸린 추기경은 추가치료를 사양한 채로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나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가족들과 성탄 전야 미사를 함께 지낸 뒤 미국으로 떠나기 앞서 아침결에 문병 겸 출국인사를 드리려고 추기경을 찾았다. 때마침 비서신부 집전으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이라 추기경은 병상 침대에서 그냥 앉아서 참례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성령 청원의 일치 기원을 청할 때였다. 추기경이 느닷없이 소리 내어 홀로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힘겨워 하며 끝까지 노래를 이어가지 못하는 노 사제를 대신해 우리 부부와 간병인과 비서수녀 등이 나머지 소절을 받아서 불렀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목이 메인 채 그냥 따라 불렀다.

김 추기경은 세상을 떠나기 전 ‘평화신문’ 기자에게 삶을 마감하기 앞서 한 마디 하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적게 가진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세상살이,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은 것과 복 지은 것 뿐.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가자.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만이 울었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엔 당신 혼자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이듬해 2009년 2월 16일, 눈을 감은 김수환 스테파노 사제는 온 누리를 향해 마지막 말을 남겼다.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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