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백선엽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1.12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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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쓰는 신인물사 [3]

백선엽은 “지금까지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내가 앞장서겠다.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라고 말한 후 

허리춤에 찼던 권총을 빼들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장병들의 중간을 가르면서 달려 나갔다.

[백세시대=오현주기자]

대구 북방 다부동 전투(1950년 8월 3일~9월 22일)는 유례없이 치열했다. 북한군은 처음부터 다부동을 노렸다. 불과 22km 떨어진 대구를 바로 찌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국군 제1사단 정면에 무려 4개 사단 2만 병력을 몰아넣었다. 국군 제1사단은 백선엽 지휘 아래 있었다. 제1사단 병력은 모두 7000여명. 병력은 3대 1, 화력은 10대 1로 북한군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적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다부동은 수암산과 유학산 그리고 멀리 가산으로 빙 둘러싸인 협곡으로 전투는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투였다. 아군과 적군은 서로 맞붙어 소총 대신 대검과 수류탄을 들고 싸웠다. 낙동강이 뚫리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도 실지 회복이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이 전투는 더욱 중요했다. 

미군은 낙동강 기슭에다 전폭기를 대거 동원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력한 융단폭격을 가했다. 어느 하루, 제1사단 휘하 1개 대대가 북한군에게 밀려 자칫 미27연대 측면이 뚫릴 위험에 처했다. 다급해진 미 연대장이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생각이 있느냐?”고 힐난했다.

볼멘소리를 듣자마자 백선엽은 유학산 아래에 백병전이 계속되던 328고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까지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아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그리고 백선엽은 허리춤에 찼던 권총을 빼들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11연대 1대대 장병들의 중간을 가르면서 달려 나갔다. 다급한 상황에서 몸소 보여주었던 ‘사단장 돌격’이었다. 신라 호국불교가 그렇게 가르치던 화랑정신의 세속오계, 그 가운데 특히 전장에 임해서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임전무퇴’의 극적 시범이었다. 병사들이 일약 분발해준 덕분에 뺏고 뺏기기 열다섯 차례, 마침내 격퇴에 성공했다. 고지전에서만 아군은 2300명, 적군은 5690명의 전사자가 날 정도로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에서 유엔군은 1만명, 북한국은 2만4000여명이나 사상자가 났다.

평양 탈환 제1착 영예 얻어

얼마 뒤 인천상륙작전이 극적으로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쟁은 리듬을 탄다. 개전 초기에 물밀 듯 남하했던 북한군처럼 유엔군 소속 국군도 질풍노도처럼 북진했다. 당초는 미1기병사단이 정공으로 올라가고 미24사단이 우익을 맡아 역시 평양으로 진격할 작전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개성, 해주 등지를 공격해서 후방의 적을 소탕하도록 짜여졌다. 백선엽은 이 계획이 마뜩찮았다. 미군 지휘관에게 가서 “평양은 내 고향이고 나를 따르는 장병 또한 잃었던 땅을 찾는 노릇인데 거기에 앞장서지 못한다면 그 사기 저하는 어찌할 것인가?”라고 했다. 설득이 주효해서 미24사단 역할을 제1사단이 대신 맡았다. 백선엽 부대는 미1기병사단보다 15분 앞서 ‘평양 제1착’이란 영예를 안았다.

백선엽은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에 한국군 대표로 참석했다. 당초 미국 대 중공, 북한군을 당사자로 한다는 구상이었지만 한국군 장교를 빼놓은 휴전 회담은 안 된다고 미국 측이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휴전회담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뢰를 사는 인물이며 동시에 한국 정부 입장에선 미군 지휘관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성 높은 인물이면서 그 사이 보여준 발군의 전공에다 금상첨화로 중국어 구사 능력이 감안된 인선이었다. 

정전회담에 나가긴 했어도 정치적 담판은 체질에 안 맞았다. 그런 그에게 마침 지리산 공비토벌의 책무가 주어졌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영호남 산악지대에 남부군사령관이 이끄는 빨치산 약 4만명이 나중에 휴전선이 그어진 일대의 열전 제1전선에 이어 제2의 전선을 만들며 한국 안보에 뒤통수를 치던 상황이었다. 

낮에는 국군 쪽에 밤에는 공비 쪽에 야합한다고 파악되는 이른바 통비부락이라 점 찍히면 그대로 불태웠다. 백선엽은 통비가 될 수밖에 없는 사정에 먼저 착안했다. 살아남기가 절체절명인 백성에게 이념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태워버렸던 마을의 주민들을 먼저 찾았다. 무릎을 꿇고 빌었다. 피해 복구도 약속했다. 군이 아낀 경비를 가지고 현지 지방정부도 참여시켜 마을 재건을 서둘렀다. 한편으로 군인들의 민폐를 근절시키려고 대민 군기도 엄정하게 다잡았다. 

빨치산 고아 위한 ‘백선 육아원’

수도사단과 8사단을 거느린 백선엽의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연말에 대대적인 작전을 폈다. 그 결과, 생포내지 투항한 빨치산만도 무려 7000명에 달했다. 그들을 광주와 남원에 설치한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 그 주변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떠돌자 백선엽은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도 거두었다. ‘백선 육아원’이 그렇게 생겨났다. 처음엔 빨치산고아들 위주였다가 나중에 전쟁고아도 수용했다. 1988년부터는 천주교 대구교구 수녀회가 맡아서 ‘백선 바오로의 집’이란 이름으로 정신지체아동을 돌보는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죽자 휴전회담은 급물살을 탔다. 드디어 정전이 성립됐다. 

백선엽은 테일러 8군사령관의 권유에 따라 한국 전선을 총괄하는 신설 40만 병력의 제1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내무부장관을 맡으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뿌리쳤고 대신 다시 육참총장에 올랐다가 합참의장을 거쳐 전역을 맞았다.

미군도 입을 모아 “한국전쟁 영웅”

미국 워싱턴 백악관 가까이에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고 비석 앞에다 크게 새겨놓고는 그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이름을 들은 적도 없던 땅에서 만난 적도 없던 사람들을 위해 싸웠다”라고. 

백선엽도 그들이 만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이념 대결의 열전이 발발하자 분연히 참전했던 그들과 함께 백선엽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지켰다. 그 전장에서 그는 승패의 중요 갈림길마다 중요 임무를 맡았고 그때마다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일신으로 타고난 운이었다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었다. 옛말에 이르길 ‘운이란 하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고 안 하려고 해서 안 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참전 미군도 입을 모아 ‘한국전쟁의 영웅’이라 칭송했던 백선엽의 운수가 대운이었음은 바야흐로 나라에 큰 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을 동족상잔이 아니라 한민족 대 일부 극열 공산주의자 사이의 싸움이라 했다. 6‧25전쟁 때 분골쇄신했던 장병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 군사력은 통일신라 이후 가장 강력한 국민국가를 지키는 안전판으로 자랐다. 남북한 경제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으로 자유민주 체제 대 반문명적 공산왕조 체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현대 한국이 그 국가적 성취를 자부할 때마다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飮水思源)’라는 말대로 그 내력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근원에 백선엽 대장도 들어 있음을 대한민국 역사가 살아 있는 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백선엽(1920~)은 평남 강서군에서 2남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외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외할아버지는 한말 군인이었다. 일제강점기 만주군의 간도특설대 중위로 있다가 해방을 맞아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일했다. 군사영어학교에서 한달 훈련을 받고 중위로 임관된 뒤 부산 5연대 창설요원으로 부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에 제1사단장으로 참전했다. 휴전 회담 때 한국 측 대표단으로 활약했다. 1953년 대한민국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했다. 육참총장, 합참의장을 거쳐 예편 후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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