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문화로 나라 지키고 꽃 피우겠다”는 깊은 뜻 후손에 전해
간송 전형필 “문화로 나라 지키고 꽃 피우겠다”는 깊은 뜻 후손에 전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1.19 13:17
  • 호수 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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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다시쓰는 신인물사 [4]

1940년까지 훈민정음 원본의 행방이 묘했다. 

어느 날 경북 안동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간송은 당시 

큰 기와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돈의 11배를 주고 이를 사들였다. 

6‧25 전쟁 때 수장품을 부산으로 옮길 때도 이것만은 

몸소 챙겼다. 훈민정음 원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우리의 자랑 훈민정음 원본은 놀랍게도 1940년까지 행방이 묘연했다.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뉜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은 글로, 한글을 창제한 이유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반면, 해례는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례를 설명했다. 그런데 1940년 예의와 해례가 모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정본이 발견됐다.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이 해례본을 수장하기까지 일화 역시 극적이다. 1940년 여름, 한남서림에서 우연히 한 거간을 만난 간송은 훈민정음 원본이 경상도 안동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걸 사려면 1000원은 족히 들어야 한다고 했다. 1000원은 당시 큰 기와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하지만 간송은 지체 없이 1만1000원을 주며 훈민정음 원본을 구해달라고 했다. 1000원은 수고비라면서.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간송은 해례본의 실물을 공개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한글학회 학자들이 놀라움과 기쁨의 환성을 지른 것은 당연했다. 6‧25 전쟁 당시 미군 헌병의 보호 아래 간송의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의 수장품을 부산으로 옮길 때도 해례본만큼은 몸소 챙겼다. 이후 간송의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간송이 오래 전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해 일제의 강취로부터 보호하고 전란 속에서도 지혜롭게 보호‧보전해 준 것이 더 없이 고맙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문화독립운동가로서 간송의 참모습을 우러러보는 이유다.

재산 물려받아 ‘20대 거부’

간송은 전영기와 밀양 박씨 사이에 2남 4녀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간송은 숙부의 양자로 입양됐다. 오늘날의 시각에선 다소 생소하지만 그때는 입양된 아들의 경우 생부모와 양부모 양가의 부모 슬하에서 성장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간송은 양가 부모가 갑자기 사망하자 두 집안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아 젊은 나이에 10만석 거부로 우뚝 섰다. 이 엄청난 재산은 간송이 훗날 문화독립운동가로 발돋움하는데 아주 유효한 밑천이 되었다.

간송은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의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그러했듯, 간송도 희망보다는 좌절감에 시달리곤 했다. 조선이 처한 현실과 미래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자긍심이 남달랐던 간송은 일본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고민했다. 

간송은 휘문고보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춘곡 고휘동을 자주 찾았다. 춘곡은 우리나라의 첫 서양화가이다. 간송은 춘곡으로부터 조선의 문화와 미술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춘곡은 간송을 고미술계에서 최고의 학덕과 안목을 갖춘 위창 오세창에게 소개해주었다. 이는 훗날 간송이 우리나라 고미술 문화재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우리문화재 수집과 관련해 간송의 특별한 점은 일차적으로 일제강점기 이래 국외로, 특히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고미술품을 공격적으로 구입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이보다 더 우선 과제로 일본에 이미 반출된 우리 고미술품을 되사들이기에도 애썼다. 요컨대 그의 문화재 수집은 문화재 지킴과 다르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고미술품을 구입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진위 판별이다. 그런데 25세의 간송은 위창 같은 노련한 전문가의 큰 도움을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위창은 이순황이라는 정직하고도 뛰어난 전문성을 갖춘 거간(居間)을 젊은 간송에게 붙여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순황이 고미술품을 모아 놓으면 위창이 먼저 선별해서 구입할 것을 정했으니 젊은 간송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인연이었다. 

간송은 호리다시(도출)꾼들이 어쩌다 진품이 아닌 것을 가져와도 그 값을 후하게 쳐주었다. 만약 정품이 아니라고 호리다시들을 나무라면 그들이 진품마저 가져오지 않을뿐더러 간송과의 인연도 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물건을 사주면 여기에 감읍한 호리다시들은 다음에 언젠가 한번은 진품을, 때론 극품을 가져온다는 게 골동계의 알려진 비밀이라 했다. 이는 고미술품의 원주인이 그 가치를 모르고 싼값을 부르더라도 두 배, 세배 또는 열배로 제값을 쳐줬다는 훈훈한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 일화다.

간송은 위창과 논의해 그간 고서를 많이 수장해온 고서점 한남서림을 1만17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인수했다. 그리고 이곳을 고서 및 서화류 등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창구로 활용하면서 본격적인 고미술품 수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본인 골동품상 전속 중개인 삼아

간송은 많은 고미술품이 이미 일본인들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일본인 골동품상을 거래인으로 활용했다. 그중 온고당 주인인 일본인을 전속 중개 의뢰인으로 삼았다. 그런 방식으로 1935년에는 일본인에게서 거금 2만원에 고려청자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 경성미술구락부 전시 경매에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294호)을 놓고 일본인 수장가와 불꽃 튀는 경합을 벌인 끝에 거금  1만4580원을 주고 사들였다. 

간송은 일본인 부상의 수중에 들어간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인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을 여러 해에 걸쳐 공들인 끝에 1934년 일본인 수장가로부터 되찾기도 했다. 이 무렵 간송은 문인화가인 영운 김용진으로부터 추사 김정희의 수많은 서예작품과 함께 혜원의 ‘미인도’를 넘겨받는 큰 행운을 누렸다.  

이렇게 간송의 집요한 집념 덕분에 되찾거나 보존된 우리 문화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를 반영하듯 간송미술관에서 보화각에 수장된 고예술품만으로 1971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40년 넘게 특별전을 열고 있다. 아울러 전시회 때마다 1년에 두 차례 넘게 발간하는 ‘간송문화’는 우리나라 고미술연구의 가장 값진 사료집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난 1971년 가을 전시회 이후 보화각 전시를 찾는 관람객은 연인원 250만명을 넘었고 2014년 3월 DDP(동대문디자인프라자)빌딩의 개관과 함께 전시해온 간송문화전을 찾은 방문객은 70만명에 이른다 했다. 간송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문화(文華), 곧 “문화로 나라를 지키고 꽃 피우겠다”라는 깊은 뜻을 후손들이 온전히 되새기고 있는 것이었다.

문화재 말고 현금 유산은 안 남겨

필자의 모교인 보성고등보통학교는 1906년 개교한 이래 여러 차례학교 운영권이 바뀌었다. 그러던 중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학교가 경영난에 빠져 큰 곤경에 처하자 간송이 학교를 인수했다. 일제가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고 영원히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노골화하자 이에 대한 무언의 항거로 막대한 출혈을 감내하면서까지 민족학교인 보성고보를 인수함으로써 육영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나는 1950년대 후반 종종 혜화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또는 학교 뒷산 성곽 위에서 보화각을 바라보며 ‘우리 교주의 박물관’이라는 흐뭇한 감상에 잠기곤 했다. 만약 간송이 물려받은 재산을 늘리기 위해 더 많은 땅이나 사들이고 대 지주 역할에 만족했거나 아니면 당시 열풍이 몰아치던 금광업에 투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남북 분단과 1950년 5월 22일 발표된 초유의 토지 개혁으로 소유 농지가 크게 축소되는 과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송에겐 그 큰 재산을 문화재 보호 보존에 과감하게 투입하는 혜안과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2013년 간송의 자손들이 부친의 문화 유업을 계승하기로 뜻을 모았다. 보화각이 수장한 문화재 관리의 공공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의 용단을 내렸던 것. 간송이 1962년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기고 갑자기 타계했을 때 문화재 말고는 직계후손들이 현금화할 만한 유산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후손들은 선친의 소장품 가운데 지금까지 한 점도 고미술품 시장에 내놓은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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