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 “암울했던 시대 통쾌하게 살아… 일본 형사에게도 반말”
월남 이상재 “암울했던 시대 통쾌하게 살아… 일본 형사에게도 반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1.26 13:27
  • 호수 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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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다시쓰는 신인물사 [5]

오늘 동양에서 제일 큰 도쿄의 병기창을 보니 

과연 일본이 동양의 최강국임을 알게 되었소.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성경 말씀에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구절이 있어 

다만 그것이 걱정스러울 따름이오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월남(月南) 이상재(1850~1927년) 만큼 해학이 넘치고 유머가 풍부한 한국인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문자 그대로 종횡무진이었다. 하루는 종로바닥에서 우연히 ‘미와’라는 이름의 일본 형사를 만난 적이 있다. 한국말을 곧잘 하는 일본 형사라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문안을 했다. 월남은 일본 형사라 해도 그를 존대하지 않고 반말로 응답했다.

“그래 잘 있었다. 자네는 잘 지냈나?”

미와가 대답했다.

“저는 심한 감기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즉각 월남은 응수했다.

“이 사람아 , 감기는 대포로 쏘지 못하냐?”

형사 미와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월남의 그 말 한마디에는 뼈가 있었다. 월남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아, 대포만 쏘는 일본 군국주의도 자네 감기는 고치지 못하는구나.”

월남 이상재는 1927년 내가 태어나기 꼭 1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1970년대에 내가 존경하는 미국 역사의 거인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짧은 평전을 써서 그 책 제목을 ‘링컨의 일생’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책이 잘 팔린다고 소문이 나자 어떤 분이 나에게 “선생님, 이번에는 서양사람 말고 한국사람 중에서 존경하는 한 분의 전기를 하나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권고했다. 그 말에 느낀 바가 있어 월남에 관한 평전을 쓸 마음을 갖게 됐지만 아쉽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친대신 옥살이…결국 재판 이겨

월남 이상재는 암울했던 시대에 통쾌하게 한 평생을 사신 분이다. 그는 1850년 모시 생산으로 유명한 충청도 한산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계를 따지자면 그는 고려 말의 충신 목은 이색의 16대 자손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났을 때 일가가 모두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월남은 열여섯 살 때 강릉 유씨와 결혼했는데 이 해에 그 고을에 돈 많은 부호가 선생 댁의 산을 탐내 소송을 제기했다. 그때 월남의 부친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 월남은 부친을 대신해 스스로 감옥에 가서 옥살이를 하게 됐다. 그 효성에 감동한 군수가 사흘 만에 선생을 석방시켰다고 전해진다. 옥에서 풀려난 월남은 군수에게 재판을 다시 해줄 것을 요청했고 사실을 바로 잡아 그 재판에서 이길 수 있었다.

월남은 나이 열여덟에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갔으나 낙방했다. 그 후 명문가인 죽천 박정양 승지의 집에 기거하며 정치적 경륜을 쌓았다. 1881년 서른두 살 때 홍영식‧박정양 등을 따라 일본 시찰 길에 올라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직접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고 한다.

이때의 일과 관련해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월남은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도쿄의 병기창을 보게 됐다. 그날 저녁 도쿄 시장이 베푸는 환영만찬이 있었다. 시찰단 사람들에게 일일이 감상을 묻는 순서가 있었다. 월남은 자기 차례가 되어 일어나 이렇게 한 마디 했다.

“오늘 동양에서 제일 큰 도쿄의 병기창을 보니 과연 일본이 동양의 최강국임을 알게 되었소.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성경 말씀에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구절이 있어 다만 그것이 걱정스러울 따름이오.”

고종의 벼슬 제안 끝까지 물리쳐

1884년 월남은 새로 생긴 우정국 주사로 잠시 일했다가 낙향해 시골에 있었다. 그러다가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박 공사의 추천으로 서기관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가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루는 박 공사 일행이 행차하는데 워싱턴의 아이들이 그 행렬을 뒤따라가며 돌멩이를 던지는 등 장난을 쳤다. 재래의 도포를 입고 행차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그 행차를 호위하던 미국 경찰은 돌멩이를 던지는 아이들을 다 잡아서 경찰서에 보냈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월남은 워싱턴 DC의 경찰서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월남은 경찰서장에게 “어느 나라에서나 아이들은 신기한 것을 보면 돌을 던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것들을 잡아 가두면 되겠습니까. 즉시 석방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워싱턴 신문 석간에 ‘한국에서 오신 신사’라는 주제로 한국의 시찰단을 칭찬하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박정양 공사의 미국 내에서의 활동은 크게 성공했고 귀국한 일행은 고종의 마음을 매우 흐뭇하게 했다. 그러나 중국의 이홍장은 이런 사실에 분개해 고종 황제를 못살게 굴었다. 고종은 견디다 못해 이홍장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공사 박정양을 잠시 옥에 가두었다. 

어느 날 고종은 월남을 불러 그 노고를 치하하며 “이번에 수고가 많았어. 차제에 벼슬을 한 자리 하지”라고 했다. 월남은 고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제가 모시고 갔던 어른은 죄를 입어 옥중에 있는데 모시고 갔던 놈이 벼슬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아뢰오”라고 말했다. 

그 말에 감동한 고종이 “그럼 자네 아들이 있지 않나? 이번 기회에 벼슬을 한 자리 주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월남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 아들놈이 배운 게 없어 시골서 농사를 짓고 있는 터에 벼슬이 웬 말이옵니까. 안될 말씀인 줄 아뢰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벼슬을 사양하고 어전을 물러나는 월남을 보고 고종 황제가 입속말처럼 “저런 신하만 있으면 나라가 되겠는데”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났다. 그때 군국기무처가 새로 마련되면서 월남은 승정원의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이라는 높은 관직에 오른다. 그 뒤에 외국어학교가 설립됐을 때 교장직도 겸임했다. 그러나 그 해에 부친상을 당하자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에 내려가 은거했다. 이듬해 다시 부름을 받아 상경해 학부참서관, 법부참서관이 됐다. 그해에 일본이 깡패들을 동원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월남은 그때 내각총서와 중추원 일등의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 자리에서 월남은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부정부패를 추방하는 일에 일등공신으로 국왕을 보필했다.

그해 7월에 서재필‧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굳히는 동시에 신문을 창간했다. 

위당 정인보 “민족의 스승” 이라 해

1905년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한 ‘오조약’ 이후로 일본에 국권을 점차 빼앗긴 사실을 통탄한 나머지 월남은 자살할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울에 생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종교부 총무로 취임해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일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월남이 독립운동에 연루되었다 하여 재판을 받고 있던 때의 일이다. 재판장이 말했다.

“나가고 싶은가?”

월남이 대답했다.

“나가라면 나가고 있으라면 있을 뿐이다.”

재판장이 이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보석을 해 줄 터이니 보증금 300원을 낼 수 있는가?”

월남이 대답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 푼전도 없다.”

“그대가 윤치호를 잘 알지 않는가. 그에게 보증금을 말해보면 어떤가?”

월남이 대답했다.

“내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 남에게 구걸하지는 않겠다.” 

일본인 재판관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월남은 1921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그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1924년에는 소년척후단(보이스카우트)의 세계대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월남은 한국대표단을 인솔해 그 대회에 참석했다. 귀국 이후 보이스카우트 총재로 추대됐고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 등에 박차를 가했으며 조선일보 사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월남이 신간회의 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27년의 일이었다. 신간회는 민족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지도자들이 하나 되어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이었다. 

그해 3월 29일 월남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회장은 국장 못지않았다는 말이 파다했다. 세브란스 병원을 세운 올리버 에비슨은 월남 서거의 비보에 접해 “영국에서는 글래드스톤을 두고 ‘영국의 거인’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월남 선생을 두고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한국의 거인’이라고!”라고 말했다. 소설가 박종화는 추모시에서 “오오 당신은/ 이 겨레의 아버지/ 대한의 성웅이셨네”라고 했고, 위당 정인보는 월남을 ‘민족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산에 있던 월남의 묘소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 옮기도록 주선해 오늘 월남은 거기에 잠들어 있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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