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소원한 목적 이제야 이뤄…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 구나”
안중근 “소원한 목적 이제야 이뤄…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 구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2.02 13:37
  • 호수 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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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다시쓰는 신인물사 [6]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 후방에 있던 안중근은 이토가 

자기 앞을 조금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온 찰나 의장대 

앞으로 뛰쳐나가며 이토를 조준해 브로닝 8연발 권총으로 

네발을 발사했다. 안중근과 이토의 거리는 10여보에 불과했다. 세발이 명중했다.

그리고 안중근은 한국 말 대신 러시아 말로 ‘우레 꼬레아’(대한국 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거사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려 함이었다.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안중근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를 떠올린다. 의거는 이토 처단 그 차제가 목적이 아니었다. 안 의사가 진정 바랐던 것은 처단 후 국제 재판 과정에서 일제의 한국 침략상을 세계에 알려 동양 평화를 지키는 것이었다. 

안 의사는 의거의 명분과 목표를 분명히 했다. 그는 이토와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며 만약 개인적 원한으로 처단했다면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세계 대세를 짐작하는 그가 이토를 처단한 것은 한국 독립만이 아니라 이토의 조국인 일제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의거의 진실은 당장에 어렵다고 한다면 훗날에라도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 확신했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9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씨의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슴에 7개의 점이 있어 할아버지가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것이라며 ‘응칠’이라고 이름 지었다.

의사의 집안은 수천 석을 하던 대 지주로서 대대로 해주에서 살아온 향반이었다. 안중근은 7~8세에 뛰어난 유학자였던 할아버지의 훈도로 8~9년간 한문과 사서삼경을 익혔다. 내심으로는 학문보다는 장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뜻을 품었다. 

해외 망명해 의병 부대 창설 

안중근은 19세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라는 영세 명을 받았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골 동네인 청계동에 교회를 짓기도 했다. 안중근은 신부를 수행해 해주, 옹진 등 황해도 각지의 순회 전도에 참여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안중근은 1906년 봄,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로 이사했다. 거기서 삼흥학교를 설립했다. 삼흥은 ‘국토와 국민이 흥하게 해서 나라를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안중근은 이 학교 외에도 돈의학교도 꾸려나갔다. 돈의학교는 진남포 교당의 프랑스 사람 주임신부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걸 안중근이 사재를 털어 인수했다. 

안중근은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고 광무 황제(고종)가 억지로 퇴위 당하고 군대마저 강제 해산당하는 걸 두고만 볼 수 없다며 1907년 가을에 해외 망명을 단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은 연해주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을 상대로 300여명 규모의 의병 부대 ‘동의회’를 창설했다. 

안중근 의병 부대는 국내 진입 작전을 개시했다. 1908년 6월 안중근의 지휘 아래 두만강을 건넌 의병 부대의 첫 번째 작전은 두만강 최하단인 함북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제군 수비대 급습이었다. 일제군 여러 명을 사살하고 그 수비대의 진지를 점령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일제군과 일본인을 포로로 잡았는데 안중근은 일제가 잘못이지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고는 국제 공법에 따라 석방해주었다. 부대원들은 이런 처사를 수긍하려 하지 않았다. 일군은 의병에게 음식을 제공한 민간인조차도 체포해서 총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안중근 의병 부대는 내분이 들끓었다. 끝내는 의형제인 엄인섭 마저 떠나면서 의병 부대는 분열되고 말았다. 한편 풀어준 포로가 일제군에게 정보를 제공한 탓에 안중근 의병 부대는 일군의 공격을 받아 무참히 퇴패했다. 

1909년 10월 중순 안중근은 이토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재기를 도모하려던 안중근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안중근은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했다. 안중근이 이토 포살을 결행하기 위해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것은 1909년 10월 21일이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 도착하자 통역 유동하에게 이토 포살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냈다. 당초 안중근은 의거의 성공을 위해 동청 철도의 출발지인 남장춘과 도착지 하얼빈 등 4개 지점에서 의거를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돈이 모자랐고 또 인력도 부족해 부득이 도착 예정지인 하얼빈과 중간 교차역 채가구 두 곳에서 계획을 거행하려고 했다. 채가구에는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하얼빈은 안중근 자신이 맡았다. 

이토 저격, 중국도 바라던 것

안중근은 유동하로부터 이토가 10월 25일 아침에 하얼빈에 도착할 예정이란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토는 예정보다 하루 늦은 10월 26일 아침에 도착했다. 안중근은 10월 25일 하얼빈에 거주하는 김성백(한민회 회장)의 집에서 묵고는 26일 새벽에 하얼빈 역으로 나갔다. 오전 7시 쯤 하얼빈 역에 도착하니 러시아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며 이토를 맞을 준비에 부산했다. 안중근은 경비망을 교묘하게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이토를 실은 특별 열차는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는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30분간 회담한 후 9시 30분 경 코코프체프의 선도로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 사열을 마친 이토는 몇 걸음 되돌아서서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했다.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 후방에 있던 안중근은 이토가 자기 앞을 조금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온 찰나 의장대 앞으로 뛰쳐나가며 이토를 조준해 브로닝 8연발 권총으로 네발을 발사했다. 안중근과 이토의 거리는 10여보에 불과했다. 세발이 명중했다. 그리고 안중근은 한국 말 대신 러시아 말로 ‘우레 꼬레아’(대한국 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거사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려 함이었다.

일본 정계의 원로이자 대륙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이토가 국빈 자격으로 하얼빈을 찾은 것은 러시아와 함께 남북 만주의 분할 점령을 결정짓기 위해서였다. 그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이토는 ‘대한국의 의병 중장 안중근’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안중근의 의거는 중국도 절실하게 바라던 쾌거였다. 중국은 청일전쟁 패배의 대가로 일제에게 영토를 할양하는 등 굴욕적 수모를 당했던 데다가 러일전쟁 당시에 청의 발상지인 만주가 전쟁터가 되고 말아 중국인들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토가 러시아와 야합해 만주를 분할 점령하려는 야욕을 갖고 하얼빈에 왔으니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지만 그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바로 그때 안중근 의거가 일어났다.

의거 직후 안중근은 역 구내 헌병 파출소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은 뒤 그날 저녁 일본 영사관으로 호송됐다. 그리고는 10월 28일 일본 외상 고무라 쥬타로의 명령으로 뤼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됐고 10월 30일부터 정식 신문을 받았다. 

모친 “삶 구걸하지 않는 게 효도”

안중근은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 26일까지 5개월에 걸쳐 옥중에서 11회 신문을 받는 동안 검찰관과 일제의 한국 침략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의거 결행 후 도망갈 생각이 없었느냐는 일제 검찰관의 질문에 “의를 세우고 왜 도망해야 하는가. 나는 잡힌 뒤 재판정에서 이토의 죄상을 밝히는 기회를 얻을 목적으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예정된 각본대로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3월 9일 빌렘 신부가 감옥에서 종부성사를 거행하고 다음날 안중근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최후의 미사를 올렸다. 안중근의 사형 선고 소식은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통해 진남포에 있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에게도 전해졌다. 여사는 너무도 의연했다. 그리고 일필했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네가 만약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은 사형을 기다리며 옥중에서 두 가지 저술을 구상했다 하나는 자서전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 평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정리한 ‘동양평화론’이었다.   

사형 집행 일자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 일자를 한 달 정도 연기해줄 것을 일제 고등법원장에게 요구했다. 몇 달 걸려도 좋다는 승낙을 받자 안중근은 이를 믿고 공소권 청구를 포기한 채 저술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과 달리 열흘 뒤인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하고 말았다. 

동양평화론의 골간은 서양의 침략을 맞이해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면 한국과 청국 그리고 일제 삼국이 일치단결해야 하며 이들 삼국은 각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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