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학 “적지에 남겨두면 피란민은 공산군 손에 모두 죽어…끝까지 미군 장군 설득”
현봉학 “적지에 남겨두면 피란민은 공산군 손에 모두 죽어…끝까지 미군 장군 설득”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2.09 13:36
  • 호수 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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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다시쓰는 신인물사 [7]

피란민 10만여명을 흥남에서 거제까지 

배로 탈출시킨 ‘흥남 철수의 영웅’임에도 

현봉학은 후에 소감을 묻자 

“나는 흥남 철수로 인해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의사 현봉학(1922~2007년)은 1949년에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소재 버지니아 커먼웰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임상병리학 펠로우십 과정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현봉학은 모교인 세브란스병원에서 교수 및 의사로 근무했다. 당시로서는 첨단 분야이던 임상병리학과를 새롭게 개설한 후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현봉학은 남쪽으로 피란을 갔다. 피란지 대구에서 국회의원 황성수를 찾았다. 그 자리에서 전쟁 중인 국가를 위해 무언가 뜻 깊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하자 황성수는 현봉학을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보냈고 신 장관은 그를 미 육군 25사단의 통역관으로 배속시켰다.

얼마 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서울을 수복하자 현봉학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돌아가 의사 본연의 일에 열중했다. 그런데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준장과 김성은 대령이 부대로 다시 돌아와 통역관으로 일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차마 그 요구를 뿌리칠 수 없어 강원도 고성에 주둔 중이던 김성은 부대에서 해병대 소속 통역관으로 ‘봉사’를 이어갔다.

그때 마침 함경도 함흥에 주둔하던 미 제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이 고성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 해병대를 시찰하기 위해 비행기로 날아왔다. 통역을 맡은 현봉학과 아몬드 사령관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흥남에서 원산 거쳐 거제로 

아몬드 소장은 현봉학이 리치몬드주립 의대에서 공부했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자기 고향이 바로 버지니아 루레이라며 반가워했다. 아몬드 소장은 결국 현봉학을 미군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임명했고 현봉학은 함흥에 남게 되었다. 

젊은 의사 현봉학이 흥남 피란민 철수에 관여하게 된 과정은 한 편의 서사시와도 같았다. 그즈음 미국군은 ‘우리는 간다’라는 기치 아래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다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큰 곤경에 빠졌다. 아몬드 소장 휘하의 동부 전선 미 10군단은 함경도의 높은 산악지대에 있는 장진호 지역으로 전진하던 중 갑작스럽게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했던 것이다. 이른바 ‘장진호 전투’였다.

1950년 겨울,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 간 미군 3만 명이 인민해방군 6만7000명에 의해 포위됐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로 동사자가 속출했다. 중공군의 총격에 의한 희생보다 추위로 인한 인명 손실이 더 많았다. 미군은 악조건에서도 공군기의 대대적인 엄호사격을 받으며 포위망을 간신히  뚫을 수 있었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미군 1029명이 전사하고 7338명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행방불명자는 4894명에 달했다.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장진호 지역의 포위망을 벗어난 미군이 집결한 안전지대가 바로 항구도시 흥남이었다. 그때 흥남에는 12월초부터 많은 피란민이 모여들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피란민들이 너도 나도 항구도시 흥남으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이때 현봉학은 흥남부두에 몰려온 피란민의 운명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그들을 구출할 방도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10만여 명에 달하는 피란민을 육로로 흥남에서 원산을 거쳐 남쪽으로 피란시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비행기로 공수하기에도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현봉학은 고심 끝에 뱃길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론짓고 김백일 육군 제1단장과 함께 아몬드 사령관을 찾아갔다. 간절한 마음으로 해군 수송선을 이용해 피란민을 남쪽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했다. 이들의 제안을 들은 아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헛된 망상쯤으로 치부하며 냉정하고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사령관으로선 피란민보다 흥남부두로 몰려온 유엔군 약 10만 명과 많은 군수 물자를 후송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긴박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현봉학은 물러나지 않았다. 피란민을 살려달라고 끈질기게 애원했다. 적지 흥남에 남겨두면 피란민은 공산군에 의해 모두 비참하게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계속 설득했다. 현봉학이 아몬드 장군을 만날 기회는 현실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이걸 해결해준 이들이 있다. 한 사람은 당시 장군의 참모로 있던 에드워드 포니 해병대 대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도쿄의 맥아더 총사령관이 전선의 상황을 직접 보고하라고 파견했던 알렉산더 헤이그 육군 대위였다. 현봉학의 간절함이 차츰 아몬드 사령관의 마음을 열어 작전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할 즈음 연락장교 헤이그는 흥남부두에 모인 피란민 10만명의 구출 필요성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진지하게 보고했다. 

수송선에 질서 있게 타는 피란민들

마침내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이 흥남 철수를 아몬드 장군의 작전으로만 알았다. 아몬드 소장은 유엔군 사령관의 흥남 철수 지시를 받고 철수 계획을 수립했다. 200여척의 배가 최대 규모의 해상 수송 작전을 진행할 동안 항공 지원과 함포 사격도 지속됐다. 

1950년 12월 14일 흥남부두에 구름처럼 모여든 10만명의 피란민은 눈보라 치는 혹한의 날씨에도 언젠가는 승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노약자는 물론 젖먹이 어린이도 많았다. 절망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조용히 기다리는 피란민의 염원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 미 해군 수송선 LST가 부두에 접안해 선두의 큰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그리고 피란민의 승선이 시작됐다.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선원들은 선두의 문이 열리면 피란민이 너도 나도 몰려와 아수라장이 되리라 믿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란민들은 의외로 차분하게 여러 줄로 나뉘어 질서정연하게 승선했다. 

흥남철수 작전 60주년이었던 2010년,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15명의 미국 노병 중 한 분은 나에게 당시 상황을 회고해주기도 했다. 그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피란민이 큰 소요 없이 차례로 승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 탈출 작전을 시작한 지 열흘째가 되던 12월 24일까지 흥남부두에서 거제도로 선박에 실려 온 피란민의 수는 무려 9만1000명이었다.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대 역사였다. 실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이동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어떤 이는 현봉학을 한국의 쉰들러라고 칭송했다. 여기에 대해 나는 좀 유보적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잘 알려진 쉰들러가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구해낸 유대인 수는 1200여명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수치상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흥남 피란민 철수 작전 또는 흥남 대 탈출은 젊은 닥터 현봉학의 역할이 없었으면 분명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1992년 경 내가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의 초대학장으로 재임할 때였다. 어느 날 현봉학 박사가 국내 학회에 참석차 미국에서 방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 아주대 병원은 1994년의 개원을 앞두고 병원 임상병리학 담당 주임교수를 찾던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현봉학 박사에게 아주대 교수로 모시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전했는데 박사는 의외로 선뜻 응해주었다.  

죄인 된 듯 머리 숙인 현봉학 

이렇게 해서 나는 현봉학 박사를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뵙고 담소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됐다. 어느 날 현 박사에게 흥남 피란민 철수 작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러자 그의 밝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이 아닌가. 내심 왜 그런가 싶었는데 이윽고 자신이 간직한 먹구름과도 같은 속내를 토로했다. 

“나를 두고 흥남 대탈출의 장본인, 흥남 철수의 영웅이라고 하는데 그런 수식어를 들을 때면 인간사의 다른 쪽을 보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나는 흥남 철수로 인해 수백 만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니까요.”

그러곤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라 내가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인간 내면의 깊은 모습을 보지 못한 내 단견에 민망함을 느꼈다. 아울러 영웅이 아닌 우리 시대의 올바르고 진정한 휴머니스트로서 현봉학 박사의 참모습을 본 듯해서 한편으론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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