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뮤지엄 개관전 ‘댄 플래빈, 위대한 빛’ 전, 오직 형광등 만으로 빚어낸 ‘빛의 마술’
롯데뮤지엄 개관전 ‘댄 플래빈, 위대한 빛’ 전, 오직 형광등 만으로 빚어낸 ‘빛의 마술’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03.02 13:47
  • 호수 6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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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만을 소재로 한 자신의 미술 세계를 개척,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미국의 댄 플래빈을 소개하는 전시가 롯데뮤지엄 개관전으로 열린다. 사진은 ‘녹색 장벽’이라 불리는 댄 플래빈의 대표작 ‘무제(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의 모습.
형광등만을 소재로 한 자신의 미술 세계를 개척,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미국의 댄 플래빈을 소개하는 전시가 롯데뮤지엄 개관전으로 열린다. 사진은 ‘녹색 장벽’이라 불리는 댄 플래빈의 대표작 ‘무제(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의 모습.

롯데월드타워에 문 연 미술관… 첫 전시로 ‘미니멀리즘 선구자’ 소개

형광등이 만드는 빛과 그림자로 미술세계 개척… ‘무제’ 등 작품 눈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지난 2월 26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 새로 문을 연 롯데뮤지엄에서는 형광등 하나가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누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전시회 준비과정에서 실수로 세워둔 것 같은 형광등은 놀랍게도 미술 작품이었다. ‘1963년 5월 25일의 사선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라는 작품 제목의 작명 이유도 간단명료했다. 예상되듯 작품이 만들어진 날짜를 붙인 것뿐이다.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댄 플래빈(1933~1996)의 이 작품은 이후 미국 미술계를 새롭게 밝히는 빛이 됐다.

서울의 새로운 상징물인 롯데월드타워에 들어선 롯데뮤지엄이 개관전을 열고 관람객 맞이에 나선다. 1월 26일 개관한 롯데뮤지엄은 롯데월드타워 7층 1320㎡(약 400평)를 미술관으로 꾸몄다. 전시공간은 단순한 자연미를 내세운 건축가 조병수(60)가 설계했다. 초고층 미술관인 모리미술관과 협업해 기존 3m였던 층간 높이를 5m까지 올려 시공하는 등 1년여 간 심혈을 기울여 세계적 수준의 현대 미술 전시공간으로 완성했다. 타워 내부 공간을 최대한 기능적으로 해석해 예술작품들이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롯데뮤지엄이 첫 주자로 내세운 작가는 형광등 하나로 미국 미술계를 발칵 뒤집은 댄 플래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의 댄 플래빈의 초기 대표작 14점을 선보인다.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난 플래빈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1953년부터 미 공군에 입대, 이듬해에 한국 오산의 제5공군본부에서 주둔하며 기상정보를 수집하는 기상병으로 근무했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간 그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1961년 뉴욕의 저드슨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며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개척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부조 형태의 조각에 여러 전구를 붙이는 ‘아이콘’ 연작을 만들며 두각을 나타내던 플래빈은 ‘1963년 5월 25일의 사선’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오직 형광등만을 사용하는 작품에 주력한다. 

형광등의 빛과 그림자가 작품이 놓인 공간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현상에 매료된 것. 플래빈은 “빛으로 실제 공간을 해체하고 유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며 “빛이야말로 매우 분명하고 열려 있으며, 직접적인 예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63년 작 ‘유명론의 셋(윌리엄 오캄에게)’.
1963년 작 ‘유명론의 셋(윌리엄 오캄에게)’.

‘1963년 5월 25일의 사선’을 발표한 이후 한 개, 두 개, 세 개의 형광등이 수직 방향으로 차례로 서 있는 ‘유명론의 셋(윌리엄 오캄에게)’ 등을 거쳐 ‘녹색 장벽’이라 불리는 ‘무제(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와 같이 복잡한 작품으로 나아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볼품없는 형광등이 만들어내는 빛의 마술에 놀란다. 형광등에서 나오는 노랑, 분홍, 초록 등 다양한 색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는 성스러운 빛의 느낌을 자아낸다. 

이중 사랑을 색으로 표현한 ‘무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랑의 빛깔을 주황색과 노란색, 흰색 형광등으로 표현한 작품 ‘무제’는 ‘바버라와 요스트에게’, ‘크리스티나와 브루노에게’ ‘재닛과 앨런에게’ ‘카린과 발터에게’ 등 실제 커플 이름이 부제로 붙어 있다. 작가는 친구와 수집가, 자신에게 영감을 준 예술가나 철학자, 수학자 이름을 부제에 반영해 풍성한 스토리를 만들었다. 

‘유명론의 셋(윌리엄 오캄에게)’은 14세기 영국 철학자이자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였던 윌리엄 오컴의 사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각각 1개, 2개, 3개의 형광 튜브로 이뤄진 세 그룹의 형광등이 수직 방향으로 공간을 분할하며 서 있다. 작품을 이루는 여섯 개 형광등은 모두 밝은 흰빛을 발하며 주변으로 퍼져 나가면서 마치 우주에 온 듯한 낯선 느낌을 선사한다.

‘블라디미르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는 러시아 구축주의 조각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못다한 꿈을 담은 작품이다. 타틀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건축물을 제작해 달라는 레닌의 의뢰로 나선형 모양의 탑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제작하려 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플래빈은 그를 대신해 전구의 연한에 따라 빛을 다하고 소멸되는 형광등으로 혁명의 허무를 표현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일명 ‘녹색 장벽’으로 불리는 ‘무제(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이다. 오랜 후원자인 디아 아트파운데이션의 설립자 하이너 프리드리히에게 헌정한 작품으로 1.2m 형광등 348개를 60㎝ 간격으로 붙여 40m에 이르는 장구한 녹색의 빛 장벽을 쌓았다. 멀리서 보면 긴 장벽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걷다 보면 처음 녹색으로 보이던 형광등이 어느 새 흰색으로 보이는 마술을 경험하게 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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