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30년 독립운동에 겨우 4년 징역밖에 남은 것이 없소?”
안창호 “30년 독립운동에 겨우 4년 징역밖에 남은 것이 없소?”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3.09 13:21
  • 호수 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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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다시쓰는 신인물사 [9]

1910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국의 소식을 접한 도산은 경술국치에 대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나 자신이오”라며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다

도산 안창호(1878~1938년)는 자신의 이름으로 단행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산옹’ 또는 ‘섬뫼’(島山의 한글) 등 여러 필명으로 쓴 많은 기고문과 연설문 그리고 노랫말 가사가 남아 있다. 많은 당대인과 후세인이 도산 안창호의 일대기를 썼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방과 국토의 분단, 그리고 두 개의 나라가 세워지면서 제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가 극도로 엇갈리는 데 비하면 도산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영웅이다. 60 평생을 사심 없는 삶으로 일관하는 전범을 보였고 개개인의 자조와 근면의 미덕을 무실역행의 공동체로 승화시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하며 대동 단결, 자주 독립국가의 꿈을 품고 제시했던 통합적 지도자였다.

‘서유견문’ 읽고 충격적 개안 얻어

도산은 1878년 11월 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에서 잔반 빈농, 안흥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반세기 후 그는 나라 전체가 숭앙하는 민족 지도자로 자라고 한 세기 후 그의 이름은 독립을 얻은 나라 수도의 중심대로에 새겨졌다. 

도산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한양의 구세학당에 입학했다. 당시 한양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몇 몇 있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고 미국 북장로회 소속 언더우드 목사가 구세학당을 세웠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거저 가르쳐준다’는 교장 밀러의 가두 홍보에 적수공권이었던 시골 소년 안창호가 응답했다.

구세학당에 재학하는 중에도 독립협회가 후견하는 배재학당의 토론회에 가입하는 등 청년 지도자 수련에 나섰다. 독립협회를 세운 서재필의 연설에 감동한 도산은 회원이 됐고 서재필의 동료였던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을 읽고 충격적인 개안을 얻었다고 후일 고백했다. 서양 문화의 핵심인 정치 제도를 도입하여 조선을 자주적인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였다. 

독립협회는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1887년 음력 7월 25일 쾌재정에서 대중 집회를 개최했다. 연사로 나선 안창호는 달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안창호는 18개의 쾌재와 불쾌의 예를 대비시키면서 고관대작들의 가렴주구와 토색질을 고발하고 국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를 계기로 안창호는 관서 지역의 떠오르는 새 별이 됐고 이어 11월 23일 한양 연설을 계기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쾌재정 연설 현장에 있던 남강 이승훈은 자신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젊은이의 열변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할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도산의 민족론, 교육론에 감화된 이승훈은 즉시 상투를 자르고 자신의 주택과 서재 공사를 중단하고 그 재목과 기와로 학교를 지었다. 이렇게 탄생한 학교가 오산학교다. 이승훈은 후일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망망대해 섬 보고 ‘도산’ 호 지어 

도산은 1902년 커다란 포부를 안고 미국행 뱃길에 올랐다. 출항에 앞서 9월 3일 안창호와 이혜련은 밀러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부부는 일본 고베에서 샌프란시스코 행 여객선을 타기 전에 도쿄에서 일주일간 체류하며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새삼 감탄했다. 당시 일본은 강하고 안정된 나라의 면모가 완연했다. 배가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 서기 앞서 청년 안창호는 자신에게 도산이라는 새 이름을 선사했다.  

“하와이 부근을 지나게 되었지요. 망망한 수평선 저쪽에 조그마한 섬 하나가 있더군요. 망망한 대해 중에 홀로 서 있는 그 섬의 기개…. 나는 그 섬을 바라보면서 어떤 대양의 선구자를 만난 듯 하여 여간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호를 도산이라고 하였습니다.”

1903년 9월 25세의 도산은 몇 십 가구에 불과한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에 친목회를 결성해 회장직을 맡았다. 자신은 청소, 정원 손질 등 잡일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조선인 노동자 공동체 만들기에 투신한 것이다.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 대 지진이 일어났다. 스물네 명의 동포가 사망하고 공립협회회관이 소실됐다. 재앙의 소식을 접한 고종황제는 일본 영사관을 통해 위로금을 보냈다. 하지만 바로 전 해의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였다. 도산은 회의를 거쳐 일본 영사관을 통한 수령을 거부하고 그 취지를 고종에게 알렸다. 공립협회는 조선 교민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일본 총영사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공립협회는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교포 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의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명실상부한 대표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즈음 도산의 명성은 시베리아의 교민 사회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하여 1909년 하와이, 북미, 원동(시베리아), 멕시코 4개 지역이 결합한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되고 도산이 총회장에 선출됐다. 국민회는 회원 권익의 보호, 생활 개선, 신용 보증 등의 일에 전력하면서 국민회의 이름으로 여권도 발행했다. 

1907년 1월 8일 도산은 귀국길에 올랐다.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할 사명감이 절박하게 들었던 것이다. 머릿속에는 독립운동의 전위 조직에 대한 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춘원 “이순신과 함께 존경하는 인물”  

도산은 환국하는 길에 도쿄에 들려 여러 인물을 만났다. 망명 중인 유길준도 면담했다. 이날 이후 유길준은 도산의 열렬한 후원자가 됐다. 도산이 도쿄의 한국인 단체 ‘태극학회’에서 연설할 때 춘원 이광수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광수는 자신이 평생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역사에서는 이순신을, 현대인으로는 도산을 손꼽았다.

1910년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자 도산도 해외 망명길에 나섰다. 이때 도산이 지은 ‘거국가’는 널리 사랑을 받았다. 1910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도산은 망국의 소식을 접했다. 도산은 경술국치에 대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나 자신이오”라며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다.

1913년 도산은 ‘청년학우회’의 후신인 ‘흥사단’을 창단했다. 흥사단의 창립은 민족 독립운동가로서의 도산이 남긴 최대의 공적으로 평가 받는다. 전국의 대표 25인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도산은 무엇보다 ‘사류’(士類)의 각성을 촉구했다. 도산이 생각하는 사류는 농·공·상을 포함하여 선공후사하는 사람, 요즘 말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닌 민주시민을 뜻한다. 도산은 그들에게 무실·역행·충의·용감의 4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 생활의 훈련을 힘쓰도록 했다.  

1919년 도산은 중국 상하이로 이동했다. 4월에 수립된 임시 정부의 내무총장에 부임하기 위해서였다. 3·1운동 직후에 해외에서 공표된 임시 정부의 숫자는 최소한 9개였고 그중 6개는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6개의 내각 명단에 모두 포함된 인사는 이승만과 안창호뿐이었다.

안창호는 모든 임시 정부의 통합을 주장했다. 노령, 중국, 미국 3개 지역대표가 균분의 대표권을 행사하는 ‘임시 정부 3두 정치론’을 제안하고 독립운동의 노선에 대한 합의를 유도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 통합론은 현실의 장벽 앞에 무력했다. 기호파, 서북파, 교남파 등 출신 지역에 따른 분파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도산에게도 ‘서북파의 두목’이라는 별명이 따르기도 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기념행사에서 조선 청년 윤봉길이 폭탄을 터뜨려 시라카와 대장 등 다수의 일본인을 살상했다. 이때 도산도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김병로, 이인 등 8인의 조선인 변호사가 자진 변호를 신청했지만 도산에게 징역 4년이 선고됐다. 도산은 “30년 독립운동에 겨우 4년 징역밖에 남은 것이 없소?”라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도산은 만기 출소했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위장병 및 폐결핵 증세로 보석 결정을 받아 출옥했으나 이듬해인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파란만장한 60년이었다. 일제 당국은 도산의 장례와 문상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병원 영안실에서 거행된 고별식에 참석을 허가 받은 사람은 가족을 포함해 고작 20명이었다. 

강남, LA 등에 동상·송덕비 설립  

1962년 3·1절에 비로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남편이 떠난 지 31년 후에 아내 이혜련도 뒤를 따랐다. 

1973년 11월 10일, 탄생 95주년과 흥사단 창단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도산 부부는 유택을 공유하게 됐다. 그의 이름을 딴 도산대로가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조성되었다. 도산공원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산의 동상과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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