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국민의 신망이 두터운 이 어르신을 군사 정권도 함부로 못 대해”
함석헌 “국민의 신망이 두터운 이 어르신을 군사 정권도 함부로 못 대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3.23 13:58
  • 호수 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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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인사가 다시쓰는 신인물사 [10]

5·16 군사 쿠데타가 터졌을 때 

분연히 일어난 사람은 나의 스승 함석헌이었다. 

중국 고문에 능통한 선생은 

‘군은 불상지기(不祥之器)’라고 외치고 앞장서셨다. 

“민주적 헌법이 존재하는 민주적 국가에서 

어쩌자고 군인이 정권을 잡겠다는 것인가.”

내 나이도 이제 구십이 되니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누군가 생각하게 된다. 꼭 한 분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다면 그 분은 신천옹 함석헌 선생(1901~1989년)이시다. 내가 처음 뵀을 때가 그분의 나이가 48세였다. 나는 당장에 이 어른의 매력에 빠졌다. 무궁무진한 학식, 탁월한 말솜씨, 의연하면서도 예술적인 용모-이 모든 것이 스물 한 살의 젊은 나를 매료시켰다. 

6·25 전쟁 때 선생은 장준하 동지가 경영하는 ‘사상계’라는 잡지에 꾸준히 투고했다. 그 잡지는 함 선생께서 쓰시는 글 때문에 낙양의 지가를 올릴 수 있었다. 그 후 사상계는 10만부가 팔릴 만큼 한국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 가장 인기 높은 잡지가 됐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선생의 글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이었다. 

학생 시절에 나는 함석헌 선생의 강연이 있다는 곳이면 어디나 빠짐없이 찾아가 말씀을 들었다. 정기적인 강연회는 주로 YMCA 강당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 두 시에 열렸다. 6·25전쟁이 터진 그날 오후에도 그 장소에서 선생의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이 끝나고 몇몇 제자가 선생을 모시고 조그만 방에 모여 앉아 쾅쾅 울려오는 대포 소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하던 때의 광경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선생께서는 “이번은 심상치가 않아”라고 하시어 우리 모두를 긴장하게 했다.

그 무렵 나는 연희대학교 총학생회장(그 당시에는 학도대장이라고 불렀다)에 선출돼 몇몇 학생회 간부와 함께 밤을 새워가며 목총을 들고 학교를 지키던 때였다. 그때 학교 노천극장에서 채플 시간에 ‘종교시인 함석헌 강연회’를 세 차례 개최하기로 돼 있었다. 

학생회장인 나는 사회를 맡아 선생과 함께 노천극장 무대에 앉아 있었다. 월요일이었던 그날 강연은 무사히 끝났지만 이미 인민군의 소련제 전투기 미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연장 상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연사이신 선생께서 “학생들 저런 것에 관심 갖지 말고 내 말을 들어요”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다. 

어느 날 선생은 목에 걸었던 은빛 십자가를 꺼내 우리에게 보이시면서 “내가 이 십자가를 목에 건 채로 어디서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천주교 신자로 알겠지”라고 말했다. 그 말씀과 함께 빙그레 웃던 선생의 모습이 생각난다.

‘씨알의 소리’ 잡지로 군부에 저항

자유당 말기에는 부당하게 구속돼 한동안 감옥에 갇히셨다. 그 기간 중에 머리와 수염을 빡빡 깎으시고 스님 같은 모습으로 출옥하신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로 비틀비틀 하다가 마침내 4·19 학생 의거로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혼란이 거듭되어 일반 국민도 이대로는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던 터에 박정희 소장의 5·16 군사 쿠데타가 터졌다. 

그때 분연히 일어난 사람은 나의 스승 함석헌이었다. 중국 고문에 능통한 선생은 ‘군은 불상지기(不祥之器·군대는 정치적으로 상서롭지 못하다는 의미)’라고 외치고 앞장서셨다. 

“민주적 헌법이 존재하는 민주적 국가에서 어쩌자고 군인이 정권을 잡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선생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국민의 신망이 두텁고 이미 나이 60을 넘은 한 시대의 이름 있는 어른을 군사 정권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라는 얄팍한 잡지를 시작했는데 그 영어 제목은 ‘Voice of the People’이었고 함석헌, 김성식, 장준하, 이태영, 계훈제, 안병무, 법정 그리고 내가 그 편집에 참가했다. 그 잡지에 나도 스승의 글을 본 받아 ‘용감한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 한 편을 실었다. 

함석헌이 중심이 되고 우리가 다 모여 백만인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그것이 군사 정권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항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서명운동은 뜻밖에도 신속하게 전개돼 백만인 서명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 했다. 그런데 성급한 사람들이 다 됐다고 떠들어대니 중앙정보부가 여러 집을 습격해 서명한 책들을 몽땅 압수했다. 그렇게 백만인 서명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김동길을 유능한 젊은이로 점찍어

나는 어느 날 거리에서 기관원에 끌려가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령부 분실에서 일주일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1심 군사재판에서 15년 징역, 15년 자격정지를 선고받았다. 나는 최후진술에서 재판장 유병현 장군을 향해 “나는 그런 중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30년 동안 공권을 박탈당하게 됐습니다. 재판장이 선처를 하여 무죄 석방 되어도 또 다시 붙잡혀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항소를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한 마디 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스승 함석헌의 의연한 모습이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길은 이와 같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굽이굽이마다 나의 스승은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사회가 혼란하여 이런저런 의견이 우리의 생활 현장을 어지럽게 만든 때 유명한 인물 중의 한 분이신 함 선생을 찾아가 내 험담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런 자들이 그런 수작을 할 때마다 선생께서는 “그 사람이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한 말씀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는 정말 감동했다. 

선생을 모시고 여기저기 강연을 다닌 적이 있었다. 한번은 천안의 어떤 교회에 모시고 가서 강연을 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38선을 넘어와 남한의 여러 대학의 강연을 다니면서 두 사람의 젊은이를 점찍어 놓았어. 한 사람은 서울대 법대의 진모라는 청년이었는데 그는 6·25사변 중에 북으로 납치됐다고 소문을 들었어. 내가 또 한 사람 눈여겨 볼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때 연희대학의 학생이었어. 그가 오늘 여러분 앞에서 강연하는 김 박사야.”

나는 그 말씀에 어리둥절했다. 그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그날 불쑥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학생 때 나를 보고 이미 점을 찍어놓으셨다니 그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정말 몸둘 바를 몰랐다.  

선생께서 큰 병에 걸려 대수술을 받고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미국에서 돌아와 선생의 병실을 찾았다. 그런데 선생의 병이 많이 호전돼 나는 하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1989년 일인데 갑자기 또 병세가 악화돼 선생은 2월 4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귀국해 사모님과 합장해 장례식을 치렀다. 선생은 2006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예수의 참모습을 보여준 스승 

끝으로 한 마디만 더 하고 싶다. 함석헌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함석헌은 인도의 바가바트기타를 비롯해 노자·장자를 열심히 강의하니 그는 도대체 누구를 믿는 거야라며 나를 비난하는데 내가 누구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닌가?”

어떤 날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내가 오늘 이만큼 인생을 살아가는 건 사도 바울의 기도와 무관치 않을 거야.”

그런 말씀을 통해 젊은 내가 돈오의 경지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함석헌 선생보다 일년을 더 살고 있는 오늘의 나는 스승께서 가르쳐주신 ‘영원’(Eternity)을 즐기면서 스승께서 가르쳐주신 ‘무한’(Infinity)을 가슴에 간직하고 생의 마지막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다. 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마땅한 사람이 여럿 있는 중에도 영국 시인 테니슨이 읊은 대로 “하늘나라 그 항구에 다다랐을 때” 스승 함석헌을 만나 뵙게 될 것을 기대하니 오늘도 내 가슴은 감격으로 벅차다고 하겠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


함석헌 약력=오산중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나왔다. 오산학교 교사, 평북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 민주제도 쟁취 국민운동대회 공동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월간‘씨알의 소리’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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