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이 노인회에 베푼 자비
큰스님이 노인회에 베푼 자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6.01 14:15
  • 호수 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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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지회에 매달 100만원씩…추석 때는 과일상자도 

지난 5월 말, 모든 신문·방송이 일제히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서 열린 큰스님의 다비식을 보도했다. 5월 26일  입적한 무산(霧山) 조오현 스님. 승납 60년, 세납 87세이다. 다비식에 앞서 속초 신흥사에서 열린 영결식에 큰스님들을 비롯해 사회지도층 인사 등 3000여명이 모였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과 총무원장 설정스님, 하승창 청와대 사회혁신수석, 이수성 전 국무총리,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 성낙인 서울대 총장, 작가 조정래·이근배, 시인 신달자 등 여야, 승속, 지위 고하 가리지 않고 모여 고인을 추모했다. 백담사에 차려진 분향소엔 수만 명이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 수많은 중생들이 슬퍼하는 걸까. 스님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7세에 입산해 1959년 성준 스님을 은사로 직지사에서 출가했다. ‘불교신문’ 주필과 신흥사·계림사·봉정사 주지를 거쳐 강원도 대표사찰인 신흥사와 백담사 조실과 조계종 원로의원을 맡았다.

고인은 백담사가 출가 본사인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의 애민·생명·평화 사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했다. 매년 8월 만해축전을 개최해 시대정신과 양심을 상징하는 인사들에게 종교를 가리지 않고 만해대상을 시상했다. 그리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 초입에 ‘만해마을’을 조성해 문인들의 창작공간으로 내놓았다. 

고인은 말년에 매년 3개월씩 두 차례, 백담사 무문관에서 지냈다. 무문관은 밖에서 열쇠를 잠그는 폐관 수행실이다. 구멍으로 들어오는 하루 한 끼의 식사를 받으며 3개월간 방안에 갇혀 오직 참선 정진하는 곳이다. 무문관 수행을 끝난 뒤 대중들 앞에서 한 설법은 절집에서는 전에 듣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는 “절마다 교회마다 방송마다 신문마다 진리를 얘기하지만 시끄러운 소음이 된 지 오래다. 노망기 있는 이 노승의 설법을 듣기보다 동해바다의 파도소리와 설악산의 산새소리,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 게 낫다”고 말했다.

고인은 2015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한국학센터의 초청 강연 때 북한 핵 폐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미국에선 서부 개척시대부터 총잡이들도 총을 동시에 꺼내고 내려놓는 게 정도 아니냐”며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핵과 살상무기를 포기하는 모범을 보여 그 막대한 돈을 복음사업에 사용하라”고 권했다.

고인은 시조시인으로도 유명하다. 1968년 ‘시조문학’에 ‘봄’·‘관음기’로 등단했다. 신경림 시인은 “가장 승려답지 않으면서 가장 승려다운 시인”이라고 했다. 죽음에 임박해 대표작 선시 33편을 묶어 ‘무산 오현 선시’를 펴내기도 했다. 

고인은 생전에 노인을 배려하고 각별하게 대했다. 정형석 전 인제군지회장은 “스님은 하안거, 동안거 해제 법회에 노인회장을 불러 옆 자리에 앉히고 같이 식사하고 얘기도 나누었던 따뜻한 분”이라며 “추석 때 전 경로당에 과일상자를 보내주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고인은 노인회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인제군지회에 한 달에 100만원씩 운영비를 지원했다. 5년 전, 건강이 안 좋아진 고인은 인제군지회와 속초시지회의 관계자를 백담사로 불러 거액의 돈을 내놓기도 했다.

정형석 전 지회장은 “스님이 두 차례에 걸쳐 지원해준 4억원 중 반은 경로당에 골고루 나눠주고 나머지는 지회운영기금으로 남겨 해마다 회원들의 선진지 견학에 쓰고 있다”고 밝혔다.

노인회는 이 같은 지원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시비를 제작해 백담사 뜰에 세우기도 했다. 시비에 새긴 스님의 시 ‘아득한 성자’ 전문을 소개한다.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 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천년을 산다고 해도/성자(聖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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