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을 아시나요”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을 아시나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7.20 11:42
  • 호수 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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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하면 대부분 정경화(70)를 떠올린다. 서울시향 지휘자를 지낸 정명훈의 누나이다. 그와 동시대에 세계무대를 주름 잡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또 있다. 김영욱(71)이다. 그는 16세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지휘자 유진 오먼디와 연주하며 데뷔했다. 카라얀, 번스타인 등 20세기의 전설 같은 지휘자와 협연했고 이후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임마누엘 액스, 첼리스트 요요마와 함께 하며 일류 연주자로 올라섰다.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 그는 프랑스 파리와 미국 코네티컷주에 집을 두고 6개월은 유럽에서 나머지는 미국에서 생활했다. 핀커스 주커만 등 최고 연주가를 키운 갈라미언 선생이 ‘제자 중 가장 능력 있는 연주가’라고 그를 평했고, 유진 오먼디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장인’이라고 추켜세웠다.  

집안도 화려하다. 그는 4남2녀의 막내이다. 장남 김영식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의대 교수였고 둘째 김영기씨는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소아과 교수였다. 셋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소득이 많은 법조인 김영무 변호사(76)이다. 김 변호사는 몰라도 김&장 로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김 변호사는 서울대 법학박사, 시카고대 대학원 비교법학 석사,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법학박사이다. 김&장은 국내 최대 법률회사로 국내외 변호사만 800여명에 달하고 변리사와 회계사세무사 등을 포함해 총 1200여명의 전문인력이 포함돼 있다. 김&장은 서울대 법대 출신의 사법고시 합격자만 채용한다는 소문도 있다.  
이처럼 훌륭하게 자식들을 키운 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주치의 김승현씨이다. 

기자는 40대의 김영욱 씨를 만나 인터뷰를 한 이후 30여년간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러던 중 최근 한 일간지에서 그를 보았다. 그는 1998년 보자르 트리오의 멤버로 영입돼 활동한 지 3년만에 한국의 자택에서 넘어져 어깨뼈가 부러졌다. 그 후 단 한 차례도 연주하지 않고 2003년부터 서울대 음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2014년부터 발달장애인을 위한 문화축제인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그런데 어깨뼈가 부러졌다고 바이올린을 다시 잡지 않았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는  무대를 떠난 이유와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 “넘어지는 순간 알았다. 이제 끝이구나. 뼈가 조각나는 소리를 들었다. 연주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몸이 완벽했을 때도 모자란 연주를 했는데 이 상태로는 어떻게 하겠나. 이후로 단 한 번의 작은 무대도 서지 않았다. LA필과 연주가 예정돼 있었고 요요마를 비롯해 많은 친구가 연주하자고 몇 번이고 제안했지만 다 거절했다. 흔들림도 후회도 없다. 이게 인생이다.”

그러면서 부와 명성보다는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자기에겐 가장 기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안 되던 아이들이 특히 발달장애 아이들이 해보다가 뭐가 됐을 때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 기쁘다. 이 아이들에게는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어머어마한 무대에 서면서 연주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은 거 같다. 곡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서 의미가 더 크게 보이고 음표가 아니라 소리가 보인다”고 말했다.  

음표가 아니라 소리가 보인다는 말의 울림이 컸다. 김영욱씨 얼굴을 오랜만에 보자 30여년 전 만난 그의 어머니(이현경)가 떠올랐다. 유별난 아들 사랑이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당시 김영욱씨의 집은 종로구 운현궁 부속 건물인 영로당이었다. 몸을 잘 쓰지 못한 이 여사는 길다란 온돌방 맨 아랫목에 누워 있었다. 이 여사는 사람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의 손을 잡은 채 “영욱이는 어렸을 때 바이올린을 연습하라면 싫다고 자전거 타고 도망갔어. 영무는 얌전하고 그랬지. 영무도 첼로를 했어”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차를 가져오게 했다. 맛있어 보이는 한과가 따라 나왔다. 그런데 이 여사는 기자의 몸이 뚱뚱해보였는지 일하는 사람에게 “다른 간식을 가져오라, 커피에 설탕을 타지 마라”고 했다.  

1869년에 지은 고택을 나서며 위대한 연주자의 뒤에는 세심하고 철저하고 기억력이 뛰어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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