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서대문독립민주축제’ 서대문형무소 옥고 현장 체험하며 독립지사 추모
‘2018 서대문독립민주축제’ 서대문형무소 옥고 현장 체험하며 독립지사 추모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08.17 15:08
  • 호수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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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독립지사 풋프린팅 행사… 해외 독립 유공자 후손도 방문해 참관

역사관 무료 개방… 각종 고문 도구 전시, VR체험 등 25개 부스 운영

서대문구가 독립지사들과 광복절을 기념하는 '2018 서대문 독립민주축제' 지난 8월 14~15일 이틀간 서울 서대문형무소기념관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독립지사들이 옥고를 치른 옥사를 둘러보는 모습.	사진=조준우 기자
서대문구가 독립지사들과 광복절을 기념하는 '2018 서대문 독립민주축제' 지난 8월 14~15일 이틀간 서울 서대문형무소기념관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독립지사들이 옥고를 치른 옥사를 둘러보는 모습. 사진=조준우 기자

“독립운동 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고통이 느껴져요. 앞으로는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래요.” 

지난 8월 1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만난 김하윤(15) 양은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고초를 겪은 옥사를 둘러본 후 이렇게 말했다. 폭염 속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는 공간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참을 둘러보던 김 양은 “저도 이렇게 힘든데 그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면서 “광복의 의미가 절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제73주년 광복절을 기념하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대표축제인 ‘2018 서대문독립민주축제’가 8월 14~15일 이틀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진행됐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돼 1945년까지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었고,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담고 있는 역사적 장소다. 서대문구는 1998년 이곳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 2010년부터 바른 역사 인식과 계승을 통해 광복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서대문독립민주축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먼저 이번 축제에서는 독립지사와 민주인사들 삶의 발자취를 남기는 ‘풋프린팅’ 행사가 열렸다. 올해 족적을 남기는 독립지사는 오산학교 학생 시절 ‘혈맹단’을 조직해 항일활동을 하다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됐던 승병일(92) 지사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후 탈출해 중국유격대에서 유격전 활동을 하고 광복군 편입 후 전방 공작원으로 항일운동을 한 이종열(94) 지사다. 다만 이 지사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날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또 유신독재시절 언론탄압에 항거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도하고 ‘동아투위’를 이끌다 수감생활을 한 장윤환(82) 지사와 기독교계 반유신 투쟁의 기폭제가 된 남산부활절예배사건 등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른 권호경(76) 지사도 풋프린팅을 했다. 풋프린팅 조형물은 제작 과정을 거쳐 독립민주인사의 약력, 업적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에 상설 전시된다.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고국을 찾은 독립유공자 후손 40여명이 14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해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광복군 작전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임평 선생의 아들 임관택(90) 옹 등 후손들은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의 안내로 서대문형무소 전시관, 지하감옥, 고문실, 노역장을 둘러봤다.

광복절인 15일 오후 7시30분에는 주 무대에서 ‘단박에 한국사’ 시리즈로 유명한 심용환 역사작가가 전하는 스토리텔링 콘서트 ‘역사 속에서 손을 맞잡다’가 열렸다. 3.1운동의 내용과 의미, 광복 전후의 민족통일운동과 평화를 주제로 약 100분간 진행됐는데 무더위 속에서도 수백명의 시민이 참여해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번 축제는 가족단위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36도를 넘는 더위 속에서도 역사관을 찾은 가족들은 역사관 한쪽에 마련된 행사부스를 찾아 체험행사를 즐겼다. 독립의 등불 만들기, 자유의 깃발 보드게임을 비롯 건국대 문화컨텐츠학과(휴먼 ICT 연계 전공)가 운영하는 ‘독립의 그날까지 형무소역사관 VR체험’ 등 25개 부스가 운영됐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린 것은 행사기간 무료로 개방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그 자체였다. 3·1운동을 주도한 뒤 체포돼 19세에 목숨을 잃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저항시인 이육사, 농민지도자 이재명 등 400여명이 이곳에서 옥사하거나 처형당했다. 그만큼 역사관 곳곳에 아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행사에 참여한 아이들이 독립운동을 소재로 만든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다.	사진=조준우 기자
행사에 참여한 아이들이 독립운동을 소재로 만든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다. 사진=조준우 기자

당시 이곳으로 이송된 독립지사들은 수갑과 족쇄를 찬 상태에서 머리엔 용수라는 둥근 바구니를 써야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소리에 의지해 걷던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보안과 청사로 옮겨진다. 청사에서는 지문·인상 등을 담은 각종 조사표를 작성했다. 현재 청사 벽면에는 5000명의 수형기록표가 전시돼 있는데 이곳에서 고초를 겪은 이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다.

신상조사가 끝나면 필요에 따라 지하에 있는 취조실로 끌려간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취조실에서는 물고문을 비롯해 쇠꼬챙이로 손톱 밑 찌르기, 못 박힌 상자 안에 가두고 괴롭히기 등 각종 악행이 이뤄진다. 취조실에는 물고문 하는 모습과 각종 고문기구들이 전시돼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취조를 마친 수감자들은 보안과 청사 뒤편에 있는 옥사에 갇혀 생활한다. 단체방은 5명 정도가 지낼 만한 크기지만 수감자가 많을 때는 최대 30명이 한방을 써 제대로 누울 공간도 없었다고 한다. 이날 독립지사들이 머물렀던 옥사에서 불과 5분도 채 머무르지 않았는데도 땀으로 온몸이 흥건해졌다. 이런 곳에서 독립지사들이 혹한과 혹서를 견뎌야 했다는 사실에 많은 시민들은 안타까워했다.  

서대문형무소의 가장 구석진 곳에는 교수대가 보존돼 있는 사형장이 위치해 있다. 그 옆에는 작은 굴이 있다. 죽은 자가 형무소를 나가는 곳인 시구문(屍口門)으로 보는 이들을 절로 숙연케 만들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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