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선비론-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누가 처음 봤나?
이동희 선비론-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누가 처음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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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8.2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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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책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시대에 김부식이 썼다. 고려사는 태종 때 정인지가 아홉 번 고쳐서 집필 했다. 그렇다면 조선조 시대의 엘리트인 한림선비의 사관과 옥당선비의 언관이 만들어 놓은 조선왕조실록은 누가 제일 먼저 보았을까 

 

조선왕조실록은 519년 27대의 왕조의 역사를 명문으로 엮어 놓은 세계적인 888권의 문학적인 법제사 책이다.


손자 대에 와서야 그 할아버지 왕의 실적을 공개하고 심사해 세 번을 고쳐서 그 왕의 업적을 실록청(實錄廳)에서 실록으로 만들어 그 업적을 기리고 전국의 깊은 산속, 오대산 등 6개소를 정해 사고(史庫)로 보관해 두었다.

 

그 원고는 자하문(紫霞門)밖 세금정(洗劒亭) 물 흐르는 계곡에서 적시고 말리고 태워서 비밀을 유지 했다. 그리고 글 좀 아는 자는 사고 근처에는 아무도 가지 못하게 했다. 다만 하관(夏官)을 둬 여름철 햇빛에 말려서 보관했다.


그 역사책의 종이를 어떻게 500여 년 동안 생생하게 보관 했을까  오늘날 종이의 수명은 50년이고 일본 종이가 100년이라고 했는데 조선의 종이는 1000년 수명을 장담했다. 그것이 조선 종이의 과학이고 정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민족의 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놀라운 과학이 담긴 종합적 예술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렇게 법도 높게 비장 해 둔 역사책 블랙 박스(Black Box)의 뚜껑을 처음 연 장본인은 허망하게도 군국 일본의 식민지주 침략자였다.

 

1907년 7월에 고종이 하야하고, 8월 1일 우리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 됐다. 군대 없으니 주권이 없고 주권이 없으니 나라가 망했다. 1909년에는 일본 침략자인 이또(伊藤)가 어린 순종을 위해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었다.

 

그 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그를 사살했다. 그리고 1910년에 한일 병합을 당하고 1913년 데라우치(寺內)총독이 오대산의 실록을 동경대학도서관에 보냈다.


일본의 모든 학자들이 모여서 그 보물 같은 실록을 정독했다. 어떻게 조선조가 519년 체제를 유지했을까  참으로 흥미진진한 역사 자료에 심취 했을 것이다.

 

선비의 기록정치와 직간정치에도 압도 됐다. 그래서 이 실록은 한국 학자에겐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이병도 박사가 경성제국대학의 이마니시(今西)교수 연구실에 있어도 실록의 글자 하나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957년 이병도 박사의 국사대관(國史大觀) 책이 나올 때까지 40여 년 동안 우리의 조선사 역사연구는 일본보다 늦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학자로서는 선비정치를 찬양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총독의 문화정책의 하나로 조선은 선비 때문에 망하고 드디어 일본에 합방할 수밖에 없었다는 소위 ‘식민지사관’을 한국교육에 심어 놓았다.

 

소위 사색당쟁, 문약정치, 경제파탄의 원인이 오히려 선비정신에서 나왔다고 한 국민에게 철저하게 왜곡해 교육 했다. 그 무서운 식민사관에서 우리 사학계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간악한 식민사관으로 한국국민을 부끄럽게 했다. 왕조실록엔 몇 줄도 없는 사건을 과장해 소설로 만들고 선비의 고결한 성품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들의 식민사관 정책은 오늘날까지 성공했다.

 

우리 TV에 나오는 사극이 오늘날에도 과장돼 국가적 긍지를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 죄를 받아서 1923년에 동경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실록은 타버렸다. 타다 남은 47권이 겨우 근 10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한다. 이 위대한 조선왕조실록을 우리가 먼저 보고 국민들에게 올바르게 교육 했다면 우리 민족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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