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추사고택을 찾아
[백세시대 / 세상읽기] 추사고택을 찾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11.30 11:12
  • 호수 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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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1786~1856년)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난과 함께 추사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한문 글씨가 가득 들어찬 그림이다. 단순·고립 돼 보이는 ‘세한도’에서 채 드러나지 않는 추사의 완벽한 예술성이 이 복잡·충만한 그림 한 장에서 조금은 해소된다. 화집에서만 봐왔던 이 그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건 수집가 손창근이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그림을 기증해서다. 

불이선란도는 난 그림보다 글씨의 비중이 크다. 3개의 발문이 촘촘히 들어가 있다.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방식, 그림의 주인이 바뀌게 된 사연이 담겼다. 그림 상단에는 ‘내가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려냈다. 문을 닫고 깊이 깊이 찾아드니 이 경지가 바로 유마의 불이선일세.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마땅히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절하겠다. 만향.’이라고 씌어 있다. 

이 글은 석가모니와 동시대인인 유마힐과 보살들 간의 대화를 기록한 유마힐경 중 ‘불이법문품’에서 따왔다. 선을 구구하게 설명하는 보살에게 오로지 침묵으로 맞서 둘이 될 수 없는 선의 참뜻을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림의 왼편 아래에는 ‘처음에는 달준을 위해 붓을 놀렸다. 단지 하나는 있을 수 있으나 둘은 있을 수 없다. 오소산이 보고는 빼앗듯이 가져가니 우습도다’라고 적혀 있다. 추사가 시중드는 아이(달준)에게 그려준 것인데 그 후 제자인 오소산(오규일)이 빼앗아 갔다는 내용이다. 그림의 제목도 이 발문 중에서 나왔다. 

아쉬운 건 이번 기증에 ‘세한도’(歲寒圖)가 빠졌다는 점이다. 세한도는 1844년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이상적이 변함없이 사제 간의 의를 지키며 북경에서 책을 구해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그려준 것이다.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늦도록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비유의 말로 이상적의 의리와 배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 소나무 두세 그루와 집 한 채가 전부인 이 그림이 23.3×108.3㎝의 장대한 족자가 된 배경이 따로 있다. 이상적이 이 그림을 청나라 학자들에게 보여주자 16인이 그림에 대한 찬사의 평을 적어놓는 바람에 길어졌다.

세한도가 손창근의 손에 들어간 경위도 험난했다. 이상적이 사망한 뒤 세한도는 그의 제자에게 전해졌다가 휘문고 설립자 민영휘의 소유로 넘어갔다.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이 경매에 내놓자 후지쓰카 일본 대학 교수가 낙찰 받아 소유하게 됐다. 2차 대전 당시 서예가이자 서화 수집가인 손재형(1981 사망)은 일본의 후지쓰카 집을 찾아가 두 달 간 매일 문안인사를 하며 세한도를 팔라고 졸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후지쓰카 사망 후 그 아들을 통해 간신히 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 손재형은 정치에 투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한도를 이근태에게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썼다. 세한도는 끝으로 미술품 수장가인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현재 아들 손창근의 소유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돼 있다. 

불이선란도가 머릿속에서 채 지워지기도 전에 우연히 예산군 신암면에 위치한 추사고택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소나무가 가득한 낮은 산자락에 단아한 한옥이 들어앉아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타난다. 마루에는 세한도 액자가 걸려 있고 기둥마다 ‘세상에서 두 가지 큰일은 밭 갈고 독서하는 일’ 같은 추사 글이 걸려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 안채가 있다. 특이한 점은 주방이 두 개다. 하나는 난방용으로 가마솥이 두 개 걸려 있다. 대갓집들이 그러하듯 배고픈 이들에게 만들어놓은 음식을 먹고 가라는 뜻에서 부엌에 문을 달아놓지 않았다. 

추사는 이 집에서 태어나 7세까지 자랐다. 이 집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지었다.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추사고택 옆에는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추사의 묘도 집 가까이에 있다. 봉분도 낮고 석물은 단출하다. 

추사의 성장 환경이 여유롭지 못했을 것 같았던 선입견이 크고 번듯한 고택을 대하는 순간 바뀌었다. 추사체는 기름기를 쏙 뺀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아 뜰 구석의 감나무를 바라보며 추사체 탄생에 혼신의 노력을 다한 추사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제 글씨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일흔 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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