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3.1 운동 100주년 되새기는 만세운동] 고종 독살설이 기폭제… 전국 218곳서 “대한독립만세”
[백세시대 / 3.1 운동 100주년 되새기는 만세운동] 고종 독살설이 기폭제… 전국 218곳서 “대한독립만세”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2.15 14:05
  • 호수 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세시대=배성호기자]

1918년부터 물밑준비… 동경 유학생,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결집

독립선언식 당초 탑골공원서 태화관으로 변경… 이후 1500여회 시위

1919년 1월 21일, 한반도 전역을 슬픔에 빠트린 비보가 전해진다. 경술국치(1910년 한일합병조약에 따른 국권 상실) 후 사실상 유폐된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식혜를 먹고 붕어(崩御)한 것이다. 고종의 죽음은 민심을 술렁이게 했다. 은밀히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여기에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국의 토지를 멋대로 침탈하고 조세 수탈을 강화하면서 농민들의 상실감과 독립에 대한 염원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3월 1일,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 통치에 항거해 전국에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벌인다. 

3‧1운동의 기운이 싹튼 시점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이 독일 등 전체주의 국가들의 패배로 마무리되자, 한민족을 비롯한 약소민족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전후 평화유지 조치를 협의하기 위한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도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천도교에서는 손병희, 최린, 오세창 등이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한 끝에 1919년 1월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라는 3대 원칙을 세운다. 기독교에서는 상해 신한청년당의 선우혁과 이승훈, 양전백 등을 중심으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추진했고, 강기덕, 김원벽을 비롯해 전문학교 대표들도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세부 계획을 짜고 있었다. 

이때 고종이 갑작스레 사망하고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하면서 만세 시위 운동 준비는 급물살을 탄다. 고종 승하 후 2월 8일 한국 유학생 200여 명은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유학생학우회 총회 자리를 빌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유학생들은 1918년 말 송년회와 이듬해 1월 웅변대회를 가장해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독립 문제를 논의하고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 독립선언을 추진하기로 했다. 최팔용, 백관수, 송계백, 서춘 등 10명이 실행위원으로 선출돼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송계백은 국내로 들어와 최린, 현상윤, 최남선 등과 만나 독립선언의 취지를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동경 유학생들과 접촉한 천도교 인사들은 기독교계의 이승훈 등과 만나 종교단체의 독립운동 연합 문제를 전격 협의했고 그 결과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에 합의했다. 이어 한용운을 통해 불교계가 참여하고 기독교계인 박희도의 주선으로 학생들까지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고종의 국장일인 3월 3일을 앞두고 지방에서 많은 민중들이 상경할 것으로 보고, 일요일인 2일을 피해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선언서를 인쇄해 전국 각지에 전달하기로 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월 27일 독립선언서 2만1000여장이 완성됐다.

고종의 독살설이 기폭제가 돼 일어난 3·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한 차원 높인는 동력이 됐다. 사진은 당시 덕수궁 앞 만세시위 모습.
고종의 독살설이 기폭제가 돼 일어난 3·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한 차원 높인는 동력이 됐다. 사진은 당시 덕수궁 앞 만세시위 모습.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할 민족대표 33명을 종단별로 나누어 확정했다. 천도교에서 15명, 기독교에서 16명, 불교계에서 2명이 이름을 올렸다. 독립선언식 장소는 당초 탑골공원으로 정했으나, 폭력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인사동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급히 변경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는 33명의 대표 가운데 지방에 있던 4명을 빼고 29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불교계 대표인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했다. 이들은 태화관 주인에게 조선총독부에 신고하도록 했고, 10여분 만에 태화관을 급습한 일본 경찰 80여 명에게 모두 연행됐다.

장소가 바뀐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학생들은 2시 30분쯤 시민 약 5000명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자적으로 선언식을 가졌다. 이들은 팔각정 단상에 태극기를 내걸고 행사를 마친 뒤 동서 시가지로 나누어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같은 시각 서울 북쪽 지역인 평양과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까지 확산됐다. 전국적인 시위는 5월 말까지 이어졌고, 전국 218개 군에서 200만여 명의 주민이 참여해 1500여 회의 시위가 불타올랐다.

만세 시위는 만주나 연해주, 미주 등지의 한인에게도 확산됐다. 대표적으로 만주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수백 명의 한인이 독립 축하회를 개최했고 다음 날에는 북간도에서 1만여 명의 한인이 모였다.

범국민적 만세운동에 놀란 일제는 군대와 헌병, 경찰을 총동원해 무력 진압에 나섰다. 당시 한국에 주둔한 정규군 2개 사단 2만3000명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했다.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라며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는 등 전국에서 살육과 고문, 방화 등 야만적인 탄압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5월 말까지 7500명이 피살되고, 1만6000명이 부상을 당했고 4만6000명이 체포됐다. 또 교회 47곳과 학교 2곳, 민가 715호가 불탔다. 

무수한 희생을 낳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 지식인은 물론 노동자와 농민, 중소상공인 등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참여 주체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도 3·1운동의 결실에 따른 것이었다. 한번 표출된 독립 의지는 이후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동력으로 거듭났다. 세계적으로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무저항운동,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