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망’, 동반 치매라는 불행 속에 핀 노부부의 로맨스
영화 ‘로망’, 동반 치매라는 불행 속에 핀 노부부의 로맨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3.22 14:04
  • 호수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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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한국영화 최초 부부 치매 다뤄… 일하는 노인, 고학력 백수 등 현실 다뤄

정신 멀쩡할 때 편지 쓰며 사랑 표현하는 장면 뭉클… 이순재‧정영숙 열연

4월 3일 개봉을 앞둔 ‘로망’은 ‘부부 동반 치매’라는 소재를 현실적으로 다루면서 치매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라는 고민거리와 함께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사진은 극중 한 장면.
4월 3일 개봉을 앞둔 ‘로망’은 ‘부부 동반 치매’라는 소재를 현실적으로 다루면서 치매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라는 고민거리와 함께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사진은 극중 한 장면.

최근 50%에 육박하는 높은 시청률로 종영한 KBS ‘하나뿐인 내편’, 김혜자의 열연으로 호평 받고 있는 JTBC ‘눈이 부시게’, 이나영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기대를 모은 tvN ‘로맨스는 별책부록’ 등에 공통적으로 등장한 소재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 노인 10명 중 1명이 앓고 있다는 치매가 그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들은 치매 환자와 그들의 가족이 겪는 애환을 그려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4월 3일 개봉을 앞둔 ‘로망’도 치매가 소재다. 하지만 앞선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기존 작품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부 동반 치매’를 다룬 것이다. 

작품은 75세라는 나이에도 현역 택시운전사로 살아가는 조남봉(이순재 분)과 평생을 가정에 헌신한 71세 이매자(정영숙 분) 부부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며 시작된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 딸을 잃은 아픈 경험을 가진 부부는 아들 ‘진수’(조한철 분) 부부와 손녀 ‘은지’와 함께 살고 있다. 반평생 택시를 몰며 가족을 성실하게 부양해온 조남봉은 흔히 볼 수 있는 가부장적인 남편이자 아버지다. 

그는 박사학위를 따고도 백수인 아들과 그를 싸고도는 아내가 늘 못마땅하다. 아내를 “무식한 할망구”라 부르며 무시하고, 집에 얹혀사는 아들에게도 막말을 일삼는다. 아내 역시 툭하면 툴툴거리는 남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느 노부부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이매자에게 불현 듯 치매가 찾아온다. 그녀는 치매가 악화되면서 가스불에 냄비를 올려놓은 채 옛 생각에 빠져 있다 집을 태워버릴 뻔하기도 하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기 시작한다. 순종적이었던 아내가 이상 행동을 하고 급기야 성격마저 포악해지자 조남봉은 홧김에 ‘노망’이 났다고 힐난하며 그녀를 요양원에 보낸다. 남은 가족이라도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겨우 추스르고 아내 없는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조남봉은 자신의 신발이 흙투성이가 된 것을 발견한다. 어리둥절해 하며 평소처럼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 그는 또 한 번 놀란다. 자신의 택시가 엉망이 됐던 것이다. 부랴부랴 블랙박스를 확인한 그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이번 작품은 현재 대한민국의 70대 어르신들이 겪는 문제를 다양한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기대수명이 높아지고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수많은 노인들이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작품 속 조남봉과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조남봉은 30세가 넘은 나이에도 완전히 독립을 하지 못한 자식 때문에 은퇴도 못하고 계속 택시를 몬다. 카센터를 운영하는 조남봉의 친구 역시 수리도구를 손에 놓지 못하고 있다. 

아픈 부모를 부양하는 문제도 현실적으로 다룬다. 자녀를 예전만큼 낳지 않아 한두 명의 자식이 부모를 모두 돌봐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 세대가 풍족하게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심화된 양극화로 인해 맞벌이를 해야 겨우 먹고 살 정도지만 아이를 낳으면 수입이 반으로 줄어들고 지출은 늘어 부모 부양은 꿈도 꾸지 못한다. 고학력자여도 취업을 하지 못해 백수로 지내는 이들도 많다. 작품 속 진수 부부는 이러한 30~40대의 처지를 대변한다.    

부부 동반 치매 역시 갈수록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부부 중 한 쪽이 치매를 앓으면 그 배우자는 그렇지 않은 배우자보다 치매에 걸릴 위험이 6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노 부부과 함께 치매에 걸려 겪는 문제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그린다. 

“겁나지 않냐”는 조남봉의 질문에 “처음엔 겁도 났는데 올게 왔구나 싶으니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요”라는 이매자의 대답처럼 치매 환자의 고민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작품의 제목은 노망이 났다는 뜻과 연애(로맨스)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치매에 걸리기 전 즉, 노망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처녀총각시절 연애 감정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정 때문에 산다’는 표현처럼 애틋한 감정보다는 가족애가 더 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이 모두 치매를 앓게 되면서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특히 정신이 멀쩡할 때 스케치북을 찢어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이를 벽에 붙여 이성적인 대화를 간신히 이어나가는 장면은 오래도록 긴 여운을 남긴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열연이 빛난다. 63년 차 국민배우 이순재와 51년 차 배우 정영숙의 원숙한 연기는 극에 몰입도를 높인다. 연극 ‘사랑해요 당신’에서 이미 부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두 배우는 끈끈한 호흡으로 웃음과 눈물을 선사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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