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한·일 관계… 벨기에·독일에 답이 있다
[백세시대 / 세상읽기] 한·일 관계… 벨기에·독일에 답이 있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4.12 13:37
  • 호수 6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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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독일은 한국·일본과 유사한 역사적 갈등을 겪었다. 독일은 1914, 1918, 1940년 등 3차례 벨기에를 침공했다. 독일은 중립국 벨기에의 국경을 넘는 것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었다. 프랑스로 진격하기 위한 길을 내놓으라는 명분이었다. 벨기에는 총 한 방 제대로 쏘지 못한 채 손을 들었다. 1940년 독일은 선전포고도 없이 벨기에를 공격해 18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벨기에로선 독일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뿌리 깊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두 나라는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전후 유럽 국가들은 오랜 기간 역사를 토론했다. 그 결과 평화와 안보라는 유럽의 새로운 로드맵이 완성됐다. 현재 유럽은 70년 이상 전쟁 없는 시간을 유지하고 있다. 같은 화폐(유로)를 쓰고 경제(EU)와 안보(NATO)를 공유하고 있다.  

유럽의 화해와 협력은 그저 얻어진 게 아니다. 독일의 진정한 전후보상이 있다. 독일은 1950년대 나치 피해자 연방보상법을 제정해 개인 보상을 했다. 홀로코스트로 600만명이 희생된 유대인들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졌다. 독일은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을 지원하는 법률을 제정해 책임을 이행하고 있다. 독일은 1959년~64년 벨기에 등 서유럽 피해국들과 개별 협정을 맺어 보상했다. 2000년에는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을 만들어 징용피해자를 보상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일본은 한국·중국·베트남 등 동아시아국가의 국민을 대량학살하거나 식민지화했지만 이들 나라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보상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일본이 내놓은 3억 달러의 합의금도 박정희 대통령의 요구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런지 모른다. 

최근 한일관계는 최악의 길을 달리고 있다. 위안부 합의이행 문제, 징용 배상 판결도 그렇지만 레이더 사건의 파장도 크다. 한국이 반일 감정에 편승해 과거의 약속을 파기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이 일본에 근본적인 원인과 잘못이 있어 우리가 그러는 게 뭐 어떠냐고 말할 수 있지만 주변국들의 시각이 우리 편만은 아니다. 외교에선 약속을 깨지 않는 것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하게 보고 있다. 막말로 우리도 일본을 무력 침공해 임진왜란서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일본에 당한 만큼 그대로 되돌려줄 수 없는 이상 과거에 집착해 감정만 앞세워선 안 된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이고 국제사회에서 더 영향력이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북이 종전선언-평화협정-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일본이 유엔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사사건건 비토하고 훼방을 놓는다면 앞날이 힘들고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 정부의 대일 외교 자세이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에 정통한 외교관이 주일대사로 나가 두 나라의 난제를 풀어나가야 할 때인데도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28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한 일본통이 있다. 일본 근무만도 서기관, 참사관, 공사로 세 차례다. 도쿄 체류 기간만 10년이 넘는다. 현재 외교부 간부 중에 일본 업무 경력이 가장 오래됐다. 그런 외교관을 일본대사로 보내지 않고 유럽의 한 공관으로 이동시켰다. 과거 박근혜 청와대 근무 경력이 논란이 돼 좌천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외교관만이 아니다. 경력 26년의 외교관은 일본 근무 경험도 있고 국제법에 밝아서 외교부 안팎에서는 그가 청와대에서 대일 업무를 맡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경력을 조사하던 중 그의 가족이 현 정권에 비판적인 게 문제가 돼 청와대 행이 좌절됐다고 한다. 

미·중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일본과 담을 쌓는 건 실익이 없다. 미·일이 앞장선 인도·태평양전략에서 한국은 배제돼 있다. 최악의 상황으로 미·일이 한국을 제외하고 북·중과의 공조체제를 이끌어낸다면 한국은 한반도 파워 게임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우리 민족끼리의 평화만을 고집하다가는 동북아 정세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때 불행했던 역사가 현실 외교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벨기에·독일의 관계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일본이 독일처럼 진정성 있는 사과와 만족할만한 보상을 하지 않아 이상적인 롤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일본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의 행동이 국익에 보탬이 되는가, 외교적 측면에서 타당한지 곰곰이 따져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나가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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