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96] 등잔의 불꽃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96] 등잔의 불꽃
  • 이 기 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승인 2019.04.26 13:20
  • 호수 6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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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의 불꽃

가난하여 기름등잔 마련할 길 없으니

구하려 해도 한여름 얼음과 다름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등불 같은 마음 있어

찬란한 그 빛 옆에서 새벽을 기다린다

貧家無力辦油燈 (빈가무력판유등)

縱羨何殊夏語冰 (종선하수하어빙)

惟有此心明較火 (유유차심명교화)

煌煌傍燭待晨興 (황황방촉대신흥)

 

벽에 걸린 찬 등잔 나를 향해 비추는데

청명한 저 빛 속에서 피는 꽃 새롭구나

바람 서리 비 이슬 모두다 딴 세상 일

작은 방 희미한 등불 밤마다 봄이어라 

靠壁寒燈照向人 (고벽한등조향인)

淸明光裏發花新 (청명광리발화신)

風霜雨露渾佗界 (풍상우로혼타계) 

小屋殘缸夜夜春 (소옥잔항야야춘)

- 이익 (李瀷, 1681~1763), 『성호전집(星湖全集)』 권3 「무등호운(無燈呼韻)」, 권4 「등염(燈焰)」


우리는 불에 대해 보통 두 가지의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뜨거움의 이미지입니다. 산불, 용암, 용광로, 화마, 불바다, 불지옥 등과 같은 말은 그 느낌만으로도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총, 대포, 포탄, 원자폭탄, 가스실 같은 잔혹한 전쟁과 야만의 불꽃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우리 가슴속에서 활화산처럼 일어나는 욕망은 또 어떻습니까? 식색(食色)의 열화(熱火)나 분노·증오 같은 심화(心火)도 강한 바람 앞에 놓인 뜨거움의 불길입니다.

두 번째는 따뜻함의 이미지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여정 속에서 각인된 따뜻한 불의 이미지와 그것이 소환하는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중략)

위의 성호 선생의 시들에서 느껴지는 불의 이미지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봄 햇살 같은 따뜻함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학(儒學)에서 보는 우리 몸과 마음속의 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기본적으로 생명의 불인 온기와 에너지가 있어 생명력을 유지해갑니다. 그 불이 꺼지면 차디찬 죽음의 시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 안에는 앞서 말했던 식색지욕(食色之欲)과 기질적 욕구도 있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순결한 사랑과 올바름과 지혜의 등불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보면 성호 선생은 등잔 하나 마련할 길이 없을 만큼 가난합니다. 그래서 밤마다 빛 한 줄기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태연자약하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밝은 등불을 켜고 새벽을 기다리면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집착에 끄달리지 않고 그것을 항복받으며 주체적 자아의 존엄을 지킬 때 ‘새벽’과 ‘봄’은 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욕(大欲)을 극복한 무욕의 세계이며, 안빈낙도의 실천으로 무명을 깨친 경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 ‘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두운 것’이기에, 우리가 등불을 켜고 있으면 나도, 세상도 밝아질 수 있고, 스스로 내면의 불을 꺼버리면 바로 나에게도, 세상에도 진짜 어둠이 찾아오는 것입니다.(하략)    

이 기 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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