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이순신 목숨 살린 명재상 이원익
[백세시대 / 세상읽기] 이순신 목숨 살린 명재상 이원익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5.03 14:25
  • 호수 6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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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을 모르지 않지만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구한 이원익(1547~1634)이란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원익은 무려 60여년 간 관직에 있었고 그 사이에 영의정을 다섯 차례나 지낸 명재상이다. 

정유재란 당시 선조는 이순신을 직접 심문하는 국청(鞠廳)을 열었다. 국청이란 모반, 대역 기타 국가적 중죄인을 심문·재판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특별재판정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기거나 심기를 건드렸다. 선조는 이순신이 오만방자하다며 죄를 묻겠다고 별렀다. 이순신은 부산을 향해 진격하는 왜를 막으라는 선조의 출동 명령을 왜군의 거짓정보일지 모른다고 판단해 움직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또, 통영에서 무관시험을 보도록 해달라고 선조에 건의했다. 장수를 뽑는 건 왕의 권한인데 그걸 넘겨달라는 건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다. 원균은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왜군의 머리를 상부에 올렸다. 이순신이 가만히 보니 ‘이상한(?) 머리’가 많았다. 원균은 8세 된 서자의 손자 이름으로 올리기까지 했다. 

이순신이 이런 내용의 편지를 좌의정 유성룡(1542~1607)에게 전했다. 그런데 밀직내시가 이 편지를 중간에 입수해 선조에게 보여주었고 선조는 이를 모함으로 간주한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란 직책을 이용해 전쟁 통에 휘하 장수를 모략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200여명의 문무백관이 도열해 있었지만 이순신을 편든 이는 오직 이원익 한 사람과 좌찬성 정탁(1526~1605) 뿐이었다. 이원익은 정탁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도록 했고 정탁은 친국(왕이 직접 심문함) 내내 상소문을 소리 내 읽었다.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을 비롯 모든 이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울부짖듯이 고했다. 오후 6시에 시작된 재판이 8시, 9시를 넘어 밤 11시가 됐지만 도체찰사 이원익은 아무 말도 안한 채 맨 앞자리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도체찰사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가비상대책위원장 쯤 됐다. 당시는 전시 체제였다. 아무리 왕이 죽이고 싶어도 도체찰사가 안 된다고 하면 죽이지 못했다. 

참다못한 선조가 이원익에게 “시간이 이리 흘렀건만 도체찰사는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요. 가타부타 말을 하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발언하라고 하시니 얘기하겠습니다. (이순신을)죽이는 건 쉽지만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건가요. 제가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으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단 원균만 빼고 얘기 하십시오. 저를 설득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 10년을 서 있어도 저는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다들 원균 얘기를 하려고 하는 순간 이원익의 말 한마디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선조가 “왜 원균을 거론 못 하게 하는가”라고 묻자 이원익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을 가본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저는 그곳에 가서 지휘자가 병사를 어떻게 훈련시키고 전쟁 대비를 어떻게 하는지를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과 전쟁수행 능력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얘기다. 이순신을 감싸던 유성룡도 이날 국초에서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며 왕의 편에 섰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이원익의 말에는 반론을 못했다. 

문초와 고문이 새벽 6시까지 이어졌지만 이원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선조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역적이 아닌가 보다. 풀어 줘라”라며 한발 물러섰다. 이원익은 이순신에게 다가가 “사돈 괜찮은가요. 제가 목숨을 살렸으나 벼슬은 되찾아주지 못하겠으니 백의종군하세요”라고 말했다. 이순신의 서녀와 이원익의 서자가 결혼해 둘 사이는 사돈 관계였다. 산발한 채 초죽음이 된 이순신은 간신히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원익은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광명으로 내려가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가마니를 짜며 혼자 여생을 보냈다. 인조가 이를 딱하게 여겨 ‘관감당’이란 자그만 집을 지어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이 집에서 3년도 채 못살고 눈을 감았다. 

이원익은 생전에 “나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며 너무 부끄러웠다. 전쟁 예측도 못하고 그저 관리만 했으니 백성 앞에 죄인이니 내가 죽으면 나를 기념하지 말라”고 말했다. 

요즘 대한민국에 이원익 같은 공무원이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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