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광화문광장에서의 저녁식사
[백세시대 / 세상읽기] 광화문광장에서의 저녁식사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5.17 13:56
  • 호수 6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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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 광화문은 고향과 같은 곳이다. 청소년기를 정동에서 보냈고 사회활동의 대부분을 태평로에서 했다. 최근 광화문광장에서 무료로 저녁식사를 제공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눈이 확 띄었다. (사)한반도평화에너지센터라는 단체가 미세먼지에 대한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취지로 광화문광장에서 수백 명의 시민이 밥을 먹는 퍼포먼스, ‘미세먼지 속의 다이닝’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광화문 뒷골목에서 만취해 쓰러져 잠든 적은 있지만 광화문 한복판에서 밥상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이 기이한 체험을 해보고 싶어 주최 측에 연락을 취했다. 

5월 14일 오후 5시, 광화문광장 북측 광장에 하얀 테이블보를 씌운 원탁 테이블 40개가 놓였다. 식탁 위에는 ‘클린오투’(호흡용 휴대산소), 꽃장식과 와인, 포크와 나이프 등이 준비돼 있었다. 초로의 부부, 자녀들과 온 주부,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의 초대 받은 이들이 300개 좌석을 메웠다. 자동차 매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개회식에서 이언주 국회의원이 인사말 모두에 “이런 자리였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반기문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은 영상축사를 통해 “물은 가려서 마실 수 있지만 공기는 가려서 취할 수 없기 때문에 미세먼지와 싸움을 우리는 회피할 수 없다”고 했다.

희망문·선언문 낭독, 희망비둘기 날리기, 클린산소 마시기, 마스크 쓴 채 색소폰 연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참석자들은 지독한 매연에 시달렸다. 자동차들이 광장을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으로 내달리며 배기가스를 토해냈다. 특히 신호대기중인 디젤버스의 시커먼 배기가스는 숨쉬기 힘들 정도였다. 참가자 일부는 주최 측이 제공한 환경마스크를 쓰거나 간간히 클린오투를 코에 대고 흡입하며 간신히 견뎌내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롯데백화점에서 ‘윤가명가’라는 식당을 경영하는 한식 대가 윤경숙 오너 세프가 준비한 음식이 제공됐다. 한식의 대가라고 해서 비빔밥정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원통형의 예쁜 도시락에 스테이크와 디저트가 담겨져 나왔다.

사회자는 개막식 직후 행사장 주변의 미세먼지 수치를 알려주었고 식사 중간에 미세먼지 수치를 쟀다. 한 시간 만에 이 수치가 배로 올라 ‘나쁨’ 상태가 됐다.

이 행사를 실질적으로 주관한 윤경숙 세프는 무대에 올라 깜짝 놀랄만한 신상을 털어놓았다. 그는 “나는 기도확장기를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하는 만성호흡기질환자다. 식혜, 수정과 등을 옛날 방식으로 만드느라 뿌연 증기 속에서 마스크 쓰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 호흡기 질환을 얻었다”고 말했다.

윤 세프는 맑은 공기를 찾아 경기도 의정부, 동두천, 전곡 등지로 이사를 했고 산소 캔을 사용한지도 꽤 됐다고 했다. 그는 “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나 혼자만 음식을 잘 만든다고 되지 않는다. 식자재 제공하는 농민, 가공식품 만드는 공장, 유통하는 기업 모두 노력해야한다. 그분들을 다 설득하기는 힘이 드는 일이니 결국은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 세프가 일종의 국민 자각운동을 하는 전사가 된 배경이다. 그는 미세먼지 문제를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접근해보자는 의도에서 이번 행사를 주최 측에 제안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번화하고 매연이 끊이지 않는 열린 공간에서 우리 일상의 밥을 먹자, 그러면서 아직은 숨 쉴 수 있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더 나은 공기를 위해 할 일은 뭔지 그런 고민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제안 배경을 설명했다.

기자는 음식을 입안에 넣고 소리 없이 씹으며 주변을 살폈다. 앞으로 500년 조선 역사가 서린 광화문, 뒤로 황금빛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오른편의 미국 대사관, 왼편의 세종문화회관 등은 이곳이 대한민국 수도의 심장임을 상징한다. 

광화문광장을 찾은 행인들의 신기해하는 눈빛, 버스 승객들의 놀란 표정,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과 매연이 식사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상쾌한 저녁 봄바람을 맞으며 퇴근길 광화문광장에서의 저녁 한 끼는 일생 초유의 초현대적 예술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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