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고액 강연료보다 더 큰 걱정
[백세시대 / 세상읽기] 고액 강연료보다 더 큰 걱정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6.21 15:01
  • 호수 6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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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내용 이념 양극화 골 깊게 만들지도  

1990년 초 회사에서 오전 근무를 마치고 산정호수로 1박2일 MT를 갔다. 초저녁에 도착해 숙소 앞 공간에 모였다. 사무실에서 야외현장으로 장소가 갑자기 바뀌자 어색한 기분이 됐다. 키가 자그마하고 돗수 높은 안경을 쓴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나타나 게임의 룰을 설명했다. 강사가 문제를 내면 각자 판단해 O(맞다), X(틀리다) 자리를 찾아가는 게임이다.  

강사가 의외로 재치 있는 입담으로 게임을 이끌어 직원들의 기분이 바로 업 됐다. 목소리가 크지 않으면서도 전달이 잘돼 천부적인 레크리에이션 강사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티셔츠 차림에다 기계적인 말투라 서두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두세 개 게임을 더 진행한 후 강사는 바로 자리를 떴다. 그때 강사가 바로 김제동이었다.

최근 방송인 김제동의 고액 강사료가 물의를 빚었다. 대전 대덕구청은 교육부 시범사업에 공모해 확보한 1억5000만원의 국비를 집행하면서 청소년 대상 특강 계획을 집어넣어 강연자로 김제동을 초청해 90분간 강연에 155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경제자립도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지자체가 고액의 강연료를 받을 자격이 의심(?)되는 강사에게 국민혈세를 지급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행사는 바로 취소됐다.

김제동은 이전에도 천만원대의 강연료를 수차례 받았다는 기사가 뒤를 이었다. 아산·논산·예천·김포 등 다른 지자체에서도 그에게 고액의 강연료를 지급한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난 이후에 이 같은 일들이 많아졌다는 점에서 보수·진보 양 진영의 이념 갈등으로 번졌다.

법륜스님은 서울 강동구민회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김제동씨는 무료강연을 많이 다니고 수입의 많은 부분을 기부한다”며 “마음대로 가격을 낮게 책정하면 덤핑이다. BTS(방탄소년단)가 무료공연 해 버리면 다른 연예인들이 먹고살 수가 있겠냐”고 말해 비난을 받았다. 

법륜스님 페이스북에는 성토하는 내용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그 중 이모씨는 “문제는 강연료를 많이 받은 게 아니라 지자체가 국민 세금을 낭비했다는 것이고 김씨 자신이 평소 말하는 ‘판사 망치와 목수 망치 값이 같아야 한다’는 주장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꼼수 출신 김어준도 최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출연료는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가 “국민 혈세로 주는 강연료를 시장 가격에 끼워 맞춘다”는 비난을 받았다. 소셜 미디어에선 “다른 사람보다 과도하게 높은 것을 ‘시장 결정가격’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지적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여론 비판에 가세했다. 특히 이언주 의원(무소속)이 선봉에 섰다. 이언주 의원실은 지자체에 서류(자료)제출 요구 목록을 보내며 친여 성향 강사들의 강연비 내역을 조사했다.

요구 목록에는 ▷강연명, 행사명, 진행 날짜와 장소 ▷강사료 및 출연료 ▷강사료 및 출연료는 어떤 방식으로 부담했는지 ▷참석자 수, 행사 전체 예산 상세 내역 ▷행사 관련 결과 보고서로 돼 있다. 

이번엔 불똥이 김제동에서 탁현민으로 튀었다. 탁현민 대통령 행사기획 자문위원은 “국회의원이 여기저기 제 강연 비용과 내용을 받아보는 것은 신박한(새롭고 놀랍다는 뜻) 블랙리스트 작성법”이라고 비판한 후 “저의 강연료가 궁금하신 것 같은데 여기저기 바쁜 분들 괴롭히지 마시라. 가능하면 사양하지만 필요하다고 하면 학교는 100만원, 지자체나 단체는 300만원, 기업은 1550만원 균일가”라고 덧붙였다. 

친여권 성향의 강사들이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고액의 강연료를 스스럼없이 받는 것도 심각한 양식의 문제이지만 더 큰 걱정거리가 있다. 그들이 강단에서 쏟아내는 말들이 이 나라를 갈등과 분열의 사회로 갈라놓고, 이념 양극화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지는 않을 런지 그게 더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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