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식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일본의 ‘물체파’ 이끌며 국내 단색화에 깊은 영향
곽인식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일본의 ‘물체파’ 이끌며 국내 단색화에 깊은 영향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7.05 15:48
  • 호수 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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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유리‧놋쇠 등 다양한 소재로 실험한 작품 200여점

일본의 패전 분위기 담은 ‘작품’, 유리를 깨서 만든 ‘작품 63’ 등 눈길

이번 전시는 이우환 등 국내 단색화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곽인식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사진은 1939년도에 제작된 ‘모던 걸’.
이번 전시는 이우환 등 국내 단색화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곽인식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사진은 1939년도에 제작된 ‘모던 걸’.

모노하(物波).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미술사조로 ‘물체파’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물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모노하는 인공적인 것을 거부하고 흔히 볼 수 있는 돌‧철판‧고무‧유리‧흙‧로프 등을 소재로 사용했다. 특히 소재에도 손을 거의 대지 않아 “조각이나 회화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물건이나 내던져놓고 있는 것”이란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사물에 근본적인 존재성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 사조로 평가 받는다. 

모노하를 이끌며 국내 미술가에 큰 영향을 준 곽인식(1919~1988)의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9월 15일까지 진행되는 ‘곽인식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는 그의 대표작과 미공개 자료 등 200여점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그의 미술세계를 재조명한다. 특히 작가 사후 오랜 기간 방치되다 발굴된 총 48점을 6개월간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복원했다. 

경북 달성군(1995년 대구시 편입) 출신인 곽인식은 1937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했다. 23세가 되던 1942년 귀국해 개인전을 열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급변한 환경에서 가족이 좌익세력으로 몰리면서 194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추상주의적 회화를 비롯해 1960년대부터는 유리, 놋쇠, 종이 등 다양한 소재를 실험하면서 일본의 모노하(物派)와 한국의 단색화(단색조의 추상회화)에 직‧간접적 영향을 줬다. 이우환, 박서보 등 국내 단색화 1세대로 꼽히는 거장들보다 10년을 앞서간 셈이다.

곽인식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뉴욕에 갈 거다. 새로운 미술을 넓은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고 주변에 밝혔다. 병중에도 수많은 조각과 드로잉, 건축 스케치를 남겼을 정도로 창작 열정을 놓지 않았다. 1988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장례식 노제에는 수많은 미술인들이 애도 행렬을 이었을 정도로 국내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전후 일본의 불안한 심리를 왜곡된 신체로 표현한 ‘작품 1955’.
전후 일본의 불안한 심리를 왜곡된 신체로 표현한 ‘작품 1955’.

전시는 이런 곽인식의 작품세계를  3개 시기로 나누어 조망한다. 맨 먼저 ‘현실 인식과 모색’에서는 곽인식의 초기작 ‘인물(남)’(1937), ‘모던걸’(1939)과 패전 후 일본의 불안한 현실을 반영한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 1955’ (1955) 등을 소개한다. 이중 1958년작 ‘작품’을 눈여겨 볼만하다. 그는 1950년대 패전 후 일본의 불안하고 암울한 현실을 반영해 신체를 왜곡하거나 눈알, 손발 등 특정부위를 강조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작품’의 경우 강렬한 붓 터치로 눈알을 과장해 표현해 당시 어두웠던 사회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균열과 봉합’에서는 곽인식이 본격적으로 사물의 물성을 탐구한 시기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원색으로 두꺼운 질감을 표현한 모노크롬 회화로부터 캔버스에 바둑알, 철사, 유리병, 전구, 유리그릇, 깨진 선글라스 알 등을 부착하다 유리‧놋쇠‧철‧종이 등 재료 자체에 주목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유리의 특성에 매료돼 쇠구슬을 떨어뜨려 유리를 깨 만든 ‘작품 63’ (1963)이 대표적이다. 곽인식은 유리 조각을 캔버스 위에 다시 붙여 지울 수 없는 물질의 깨진 흔적을 보여준다. ‘돌로 깬 유리 그 자체를 작품화 한 작가’를 꼽을 때 이우환이 가장 먼저 거론되지만, 그에 앞서 곽인식이 있었던 것. 

패널에 석고를 두껍게 바르고 깨진 선글라스로 장식한 ‘작품 61-100’ (1961), 황동판을 휘게 하고 조금 찢은 뒤 다시 구리선으로 꿰맨 ‘작품 65-6-2’(1965) 등도 그의 전위적 세계를 보여준다.

세 번째 공간인 ‘사물에서 표면으로’에서는 돌‧도기‧나무‧종이에 먹을 활용한 작업을 소개한다. 1976년 이후 작가는 강에서 가져온 돌을 쪼개어 다시 자연석과 붙이거나 손자국을 남긴 점토를 만들고, 나무를 태워 만든 먹을 다시 나무 표면에 칠하는 등 인간의 행위와 자연물을 합치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후기에는 붓으로 종이에 무수히 많은 색점을 찍어 종이 표면 위에 공간감을 형성한다. 한 가지 색깔 색점으로 채운 작품은 오늘날 단색화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곽인식의 조수였던 우에다 유조(갤러리 Q 대표), 후배 작가인 최재은을 비롯해 박서보, 김구림, 곽훈, 김복영 등과 인터뷰 영상을 통해 곽인식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한국미술계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박서보, 김창열 작가가 곽인식에게 보낸 편지도 눈길을 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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