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의 선비론-영원한 선비의 나라
이동희의 선비론-영원한 선비의 나라
  • 관리자
  • 승인 2006.08.2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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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를 치르고 나니 역시 우리 민족의 사람 선발의 기준은 뚜렷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옛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흔히 유교의 원리지만 21세기 세계화의 시대에도 우리 민족에게는 뿌리 깊은 선비의 지도자상이 되고 있다.

 

그 전통 속에서 입후자들은 얼마나 자기반성을 했을까? 앞으로도 더욱 ‘수기 5덕목’을 스스로 닦아야 하고, ‘치인 3덕목’의 기준에서 공직을 수행하기로 굳게 맹세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선조들의 리더십이 수기치인 8덕목(修己治人 八德目)에서 나왔고, 지방정치의 평가기준이 바로 수령칠사(守令七事)가 돼 그 목민(牧民)의 지도자로서 드디어 청백리가 됐다.

 

이러한 사대부(士大夫)의 메니페스토(Manifest) 실천으로 같은 유교권내에서도 519년 27대, 최장의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을 자랑했다.

 

일본은 15대 장군으로 250년에 망하고, 명나라는 275년, 청나라는 295년으로 각각 끝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조상 청백리 전성시대에 비하면 미흡하다. 15세기 세종이 직위 할 때가 바로 고려의 불교 귀족국가에서 유교적 대동사회를 창건한지 불과 25년째다.

 

그 때 지도자들은 마치 청백리를 경쟁하듯 치열한 선비 생활을 했던 시절이었다.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등 국가적 지도자로는 강력했지만 사생활에서는 너무나 청백해 하늘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래서 강했다.


그런 청백리는 조선조에서 218명이 녹선 됐는데, 건국에서 선조(宣祖)25년 임진왜란 때까지 초기 200년 동안에 162명이 녹선 됐고, 그 후 300여년 동안은 56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부처에서 많이 청백리를 배출했던가?

 

놀랍게도 돈을 만지는 호조(戶曹)출신이 제일 많았고, 다음이 건설부인 공조(工曹)출신이다. 그래도 셋째가 검찰 법무의 형조(刑曹)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IMF를 불러 온 재무부, 부실 건물에 다리가 끊어진 건설부, 옷 로비 사건으로 국민을 부끄럽게 했던 우리의 검찰과 법무부가 문제였다.

 

세종은 청백리보다 더욱 어질어 성인(成仁)이었고, 언제나 의로움을 취하는 취의(取義)의 정치를 했다. 특히 세공(歲貢)을 책정하기 위해 세 번이나 국민을 여론조사 해 찬성하는 곳에서부터 세금을 거뒀다. 그래서 세종과 황희는 국민이 싫어하는 정치는 안했다. 인본정치였다.


율곡(栗谷)은 아홉 번 장원급제한 이 나라의 경세가(輕世家)로 10만 대군양성을 주장했다. 그가 병조(兵曹)의 현역으로 순직했을 때 집에 쌀이 없어 동네에서 장사를 치뤘다.


퇴계(退溪)도 열 한번을 낙향해 도산서원에서 교육에 임했다. 그의 제자가 서애(西厓) 유성룡이다. 7년 동안 전쟁지도자로 있으면서 퇴직하자 곧장 하회마을로 낙향해 증비록을 썼다. 오늘날 우리의 지도자들은 이런 낙향의 멋이 없다. 이것이 지방을 자랑스럽게 하는 전통이다.


선조가 그의 어려운 생계를 우려해 식량을 보냈는데 유성룡은 길을 막고서 말하기를 “나는 사사로운 증비록을 쓰고 있으니 국가에 대해서 일한 것이 없다”고 거절했다.

 

이것이 이 나라의 ‘무노동 무인금’의 시작이 아니었던가? 오늘날에도 우리의 가슴엔 선비 네 분을 모시고 다닌다. 만원에 세종대왕, 오천원에 율곡, 천원에 퇴계 그리고 백원짜리 동전에 문무겸전의 충무공이 다.

 

오늘날 돈이면 환장하는 우리 사회에 이렇게 위대한 선비를 모시고 다니는 마음씨가 그래도 우리들을 영원한 선비의 나라로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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