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배워 요리책 만든 충남 할매들
한글 배워 요리책 만든 충남 할매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9.06 11:27
  • 호수 6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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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51명, 충남평생교육원 ‘세대 공감 레시피’ 통해 작가 데뷔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쓴 레시피에 중고생 그림 합작… ‘잔잔한 감동’
책 ‘요리는 감이여’ 대통령도 극찬… 어르신들 “글 배운 뒤 세상 달라져”
충남교육청 평생교육원을 통해 한글을 깨친 어르신들이 중고생들과 합작해 요리책을 내고 상업출판까지 성공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어르신들과 학생들이 요리 레시피를 책으로 내기 위해 대화하는 모습.
충남교육청 평생교육원을 통해 한글을 깨친 어르신들이 중고생들과 합작해 요리책을 내고 상업출판까지 성공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어르신들과 학생들이 요리 레시피를 책으로 내기 위해 대화하는 모습.

[백세시대=배성호기자]“‘질경이 짱아찌’ 요리법. 질경이를 뜯는다. 대가리를 자르고 씻어서 삶는다….”

지난달 발간된 한 요리책에 실린 레시피다. 내용만 보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레시피(요리법)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갓 한글을 배운 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작성됐다. 레시피를 보조하는 사진 대신 투박한 그림을 넣은 점도 독특하다. 문해교실을 통해 한글을 익힌 이순례 어르신과 송경민 학생이 합작해 만든 레시피는 기존 요리책 레시피보다 정감있게 느껴진다. 이순례 어르신은 “한글을 배워 캐나다에 사는 아들에게 편지도 쓸 수 있게 됐고 운 좋게 요리책도 내게 됐다”면서 “요리책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 마음이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해교실을 수료한 어르신들과 지역 중고교학생들이 손을 잡고 발간한 ‘요리는 감이여’가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SNS에서 극찬한데 이어 발간 3일만에 2쇄를 찍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요리는 감이여’는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충남교육청 평생교육원이 진행한 ‘세대 공감 인생 레시피’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했다. 부여도서관, 공주유구도서관 등서 진행된 세대공감 인생 레시피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살아온 과정 중 특정 시점의 경험, 가족의 역사 등을 요리로 연결해 충남의 특색이 가미된 요리 레시피와 에세이를 작성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학생들의 그림을 더했다.

이순례, 방정순 어르신 등 51명의 어르신이 학생들과 매주 한 차례 이상 만나면서 레시피를 작성해 나갔고 수십 년의 노하우가 담긴 51개의 레시피가 탄생했다. 이후 레시피를 한데 모아 지난해 말 ‘요리는 감으로’라는 제목으로 비영리 출판을 하고 출판기념회를 가지기도 했다.

어르신들의 진심이 담긴 레시피는 발간 직후 입소문이 났고 투박하지만 어느 요리 책에도 담기지 않은 독특한 요리법은 큰 인기를 끌었다. 결국 출판사 창비교육의 제안으로 상업출판까지 하기에 이른다. 

방정순 어르신은 “한글을 몰라서 버스를 타는데 애를 먹었는데 요리책을 낼 수 있을 거라 기대도 안 했다”면서 “충남평생교육원과 학생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책은 1부 김치와 장아찌, 2부 국‧찌개와 반찬, 3부 요리, 4부 간식으로 구성돼 있다. 눈여겨 볼 점은 요리마다 레시피 제공자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방제남표 술빵, 성우월광표 밤버무리, 방정자표 들깻잎튀김, 이예식표 계란찜, 정정희표 참외장아찌 등이다.

할머니들이 직접 쓴 손글씨에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요리법을 보고 있으면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건강을 외치는 시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학조미료를 적당히 권하는 어르신들의 지혜도 양념처럼 배어 있다.

또한 단순히 요리법만 담지는 않았다. 할머니들이 쓴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글씨에 묻어나는 인생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르신들은 대부분 다른 가족들에게 양보하느라 교육을 받지 못했다. ‘다시마 물을 넣은 총각김치’를 쓴 김연숙 어르신의 경우 학교를 다닌 언니와 여동생과 달리 혼자만 인생 대부분을 한글도 모른 채 지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해 오른손을 쓰지 못하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배우기에 나선 그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열의를 보이면서 결국 까막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연숙 어르신은 “한글을 배우고 난 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면서 “건강을 위해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화초를 기르는 등 레시피를 쓰기 이전 보다 맛깔 나는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 몇몇 어르신들은 책 발간 이후 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초등학력인정과정에도 도전해 지난달 졸업식도 가졌다. 

주미자 어르신은 “그간 글을 몰라 고생했던 힘든 시절을 뒤로하고 밝은 내일을 꿈꾼다”며 “중학 과정도 참여해 중학교 졸업장을 받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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