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회장님, 밥풀 좀 떼시죠”
[백세시대 / 세상읽기] “회장님, 밥풀 좀 떼시죠”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12.13 15:13
  • 호수 6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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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세계 곳곳의 바닥에 전부 금이 깔린 것 같다.”

1990년 초 동유럽 등지에 해외법인, 지점을 넓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1936~2019)이 한 말이다. 개척과 도전정신이 충만했던 그에겐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돈 버는 길을 꿰뚫어보는 투시력 같은 게 있었는가 보다. 그는 동유럽이 쇠락할 때 자동차공장들을 인수해 현지에서 대우차를 만들어 판매했고 한·베트남 수교 이전에 베트남 정부의 개혁과 개방에 이바지했던 불굴의 기업가정신을 가진 이였다.

김우중 회장과 관련해 기자는 소소한 추억이 하나 있다. 1985년 기자 초년병 시절 ‘명사의 아침식탁’이란 제목으로 김우중 회장을 인터뷰 해야 했다. 김 회장은 일 년 중 200일 이상 해외출장 중이라 그를 만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대우그룹 홍보실에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은 ‘인터뷰 불가’였다.  

맨손으로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자택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의 집은 방배동 주택가에 있었다. 부근의 집들보다 특별하게 눈에 띄는 집은 아니었다. 정면에서는 단층집으로 보이지만 집안으로 들어가면 나선형 계단이 있는 이층집이다. 철제대문이 굳게 닫혀 있고 뜰 안에는 대우자동차 2대가 주차돼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나이든 수위가 나왔다. 수위에게 기자 신분을 밝히고 ‘김 회장이 몇 시에 출근하느냐’고 묻자 ‘새벽에 나간다’는 대답만 하고 들어갔다. 

다음날부터 회사가 아닌 김 회장의 자택으로 출근했다. 첫날 아침 6시 경, 대문이 열리고 은색 슈퍼살롱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차창을 통해 뒷자리에 앉아있는 김 회장이 보이자 가슴이 뛰었다. 운전석 옆에는 남자비서가 타고 있었다. 두꺼운 차창 너머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손짓도 못했다. 첫날은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차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만 보고 회사로 돌아왔다. 둘째, 셋째 날도 허탕이었다. 차를 향해 ‘김 회장니임’하고 불렀지만 차는 멈추지 않았다. 기자의 음성은 추위와 위축감에 잔뜩 기어들어가 공허하게 들렸다. 

넷째 날, 김 회장의 승용차가 자택 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과감하게 접근해 보닛에 손을 올려놓고 온몸으로 막아섰다. 차가 섰고 비서가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용건을 말하자 뒷자리에서 넥타이를 매던 김 회장이 “내일 다시 보자”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대문을 열어주는 수위의 인사를 받으며 김 회장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식당의 원탁테이블에 김 회장과 2남1녀가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김 회장의 부인 정희자 힐튼호텔 사장은 식탁에 앉지 않고 가족들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정 사장은 가정부를 두지 않고 손수 집안일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침 정월초하루여서 떡국이 식탁에 올랐다. 빈대떡과 김장김치, 백김치, 된장찌개와 시금치무침도 보였다. 

김 회장은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얼굴을 들지 않고 식사만 했다. 잠깐 얼굴을 들었을 때 그의 뺨에 밥풀이 묻어 있었다.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진촬영을 위해 밥풀을 떼어달라고 부탁하자 무표정하게 손으로 밥풀을 뗐다.  

김 회장이 식탁에서 한 말은 장녀가 “아버지 외국 가세요?”라고 묻는 말에 아무 대답이 없다가 막내아들(당시 초교 1년생)이 “언제 가세요?” 하자 그제서야 “오늘”하고 짤막하게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김우중 회장이 12월 9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알츠하이머를 앓다 세상을 떠났다. 술도 안마시고 골프도 치지 않고 오로지 일 밖에 몰랐던 김 회장이 연명치료도 거부하고 눈을 감았다는 부고 소식을 접하는 순간 30여 년 전 말없이 숟가락 소리만 들렸던 김우중 회장 가족의 아침식탁 정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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