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에게 출산휴가 주고, 고기를 즐겼던 세종대왕
노비에게 출산휴가 주고, 고기를 즐겼던 세종대왕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12.20 14:35
  • 호수 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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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이야기 [1] 태조에서 세종까지
영화 ‘천문’에서 세종을 연기한 한석규.
영화 ‘천문’에서 세종을 연기한 한석규.

태조, 왕권 지키려 왕씨 혈족 숙청… 태종, 한양 재천도 때 동전 던져 결정

정종, 말 탄 채 공 치는 격구 즐겨… 세종, 과도한 업무로 40대에 시력 잃어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이천우(조선 개국공신)에게 명하여 밥상 위에 동전을 던지게 하니, 새로 정한 서울은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 1길이었다. 이에 임금이 한양으로 서울을 천도하기를 결정하고….”-‘태종실록’ 4년(1404년) 10월 6일

둘 중에 무엇을 고를지 모를 때 흔히 동전 던지기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 중요하지 않은 사안을 결정할 때 사용한다. 그런데 조선 왕 중에는 동전 던지기로 중대 사안을 결정한 왕이 있다. 바로 태종(이방원)이다. 태종은 정종이 한양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이러한 ‘척전(擲錢)’ 이라는 방법을 쓴다.   

이처럼 조선왕조 600년의 긴 역사에는 사극 드라마에서 잘 다루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이씨 왕가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은 조선왕조실록에 담겨 있고 이는 고스란히 보존돼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총 2077책으로 된 기록물로 임금조차 볼 수 없었던 국가기밀문서였다. 왕이 생존했을 때 만들어지지 않고 승하하고 난 뒤 편찬이 시작된다.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에서 실록청을 만들고 사초(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사관이 기록한 것), 승정원일기(왕의 비서기관에서 쓴 일기) 등을 바탕으로 편집한 책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57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왕좌에 올랐다. 역성혁명을 일으킨 그의 이야기는 특히 사극으로도 수차례 만들어져 잘 알려져 있다. 이방원이 일으킨 1‧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쓸쓸한 말년을 보낸 비운의 왕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도 태종 못지않은 피바람을 일으켰다. 고려 왕족인 왕씨 일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그것이다.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고려 왕족이 남아 있으면 왕위를 되찾으려 할 것’이라는 근거를 들며 왕씨를 몰살시킬 것을 주청했다. 이를 주저하던 태조는 왕씨가 모반을 일으킨다는 제보가 잇따르자 강화도와 거제도 등으로 유배를 보내는 식으로 왕씨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태조 3년에는 결국 거제도나 강화 등지에 모여 있던 왕씨들을 바다에 빠뜨리는 식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또 중앙과 지방에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해 이들의 목을 베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일부 왕씨는 전(全)씨나 옥(玉)씨 등으로 성을 변경해 목숨을 지키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숙청은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에 의해 중단됐다. 

태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은 재위기간이 2년으로 짧아 개경 환도 외에는 남긴 업적이 거의 없다. 그는 재위기간 내내 이방원의 눈치를 봐야 했는데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격구(擊毬)를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격구는 말을 타고 기다란 격구채로 골프공만한 크기의 공을 치는 놀이로 고려시대부터 무인들이 무예를 익히기 위해 하던 구기종목이다. 정종실록에서도 수차례 기록될 정도로 그는 재위기간 내내 격구에 몰두했다.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권력욕을 보였던 이방원은 결국 1400년 왕좌를 차지한다. 그는 드라마에서 무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과거시험에 급제한 문인이기도 했다. 고려와 조선시대 문과시험은 총 3단계를 걸쳐 진행된다.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가 그것인데 최종 시험인 전시는 관리로 확정된 33명이 임금이 낸 문제에 답을 적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1~3등은 갑과, 3~10등은 을과, 11~33등은 병과가 되는데 이방원은 병과 7등을 차지한다. 전체 17등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또 태종실록에는 거북선에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임금이 임진도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도다.” -태종실록 13년(1413년) 2월 5일. 

이순신의 거북선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태종 시절부터 거북 모양의 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글을 창제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은 세금을 걷어 들이는 방법을 바꾸기 위해 최초로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또 노비에게도 100일의 출산휴가를 주고 남자노비를 대상으로도 육아 휴가 제도를 실시한 애민정신이 충만한 왕이기도 했다.    

지독한 독서광이었던 세종은 왕이 돼서도 높은 학구열과 격무로 인해 40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다. 시력은 특히 더 빨리 망가졌는데 말년인 1442년부터는 왕세자였던 문종이 나서서 대리청정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세종은 한글을 창조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룬다. 

세종은 또 남다른 고기사랑으로도 유명하다. 온라인으로도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에 고기반찬을 의미하는 육선(肉饍)을 입력해 검색하면 세종 시절 일화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이를 잘 알았던 태종은 자신이 죽어 상중(喪中, 삼년상을 치르는 기간에 술과 고기를 먹지 못한다)이라도 세종은 꼭 고기반찬을 먹으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세종은 첫 두 달 간 고기반찬을 끊기도 했지만 몸이 허약해져 결국 고기를 먹게 됐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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