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중세시대의 노인들”
[백세시대 / 세상읽기] “중세시대의 노인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01.31 14:31
  • 호수 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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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남아돌 때-가령 서울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나 고속버스 안에서-지루함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리멸렬(?)한 책을 읽는 일이다. 이번 구정 연휴에 책상에 쌓아놓기만 하고 거들떠도 보지 않던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낯선 중세’(유희수·문학과지성사). 지은이는 서양 중세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고려대 사학과 교수이다.

이 책에서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중세의 노인이다. 그 시대의 노인은 어느 정도의 나이였고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으며 무슨 일로 소일했을까. 이에 앞서 중세는 어떤 시대였는지가 궁금했다. 

대부분 중세라면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던 때를 시작으로 보고 1453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멸망한 시기를 끝으로 본다. 이 책은 중세의 시작과 끝을 연도로 적시하지 않은 대신 중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소개했다. 

오늘날 중세라면 ‘중세적 마녀사냥’, ‘봉건적 가부장제’라는 구절처럼 어둡고 폐쇄적이고 반문명적인 시대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어두운 중세’는 19세기 초 낭만주의와 더불어 극복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밝은 중세’를 증명하는데 열을 올렸다. 

미국의 중세사가 찰스 H. 헤스킨스는 저서 ‘12세기 르네상스’(1927년)에서 “12세기는 많은 점에서 새롭고 활기찬 시대였다.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고 도시와 초기 관료제 국가가 태동했다. 로마네스크 예술이 절정에 달하는 가운데 고딕 예술이 싹텄다. 속어문학이 나타나고 라틴어 고전과 로마법이 부활했다”고 썼다.

실제로 중세 때 지은 대성당이 오늘날 주요 관광코스가 됐고 중세 인물이나 사상 등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에선 마녀로 처형된 잔 다르크가 1870년 보불전쟁 이후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히틀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구호 ‘하나의 신, 하나의 교황, 하나의 황제’를 자신에 대한 환호 ‘하나의 제국, 하나의 인민, 하나의 지도자’로 사용했다.

이 책에 따르면 중세에 ‘노인은 없다’. 중세는 요절하는 사회였으므로 노인의 수도 적고 그 역할도 미미했다. 당시는 30세를 넘지 못했으므로 50세를 ‘위대한 나이’(great age)라고 부를 정도였다. 토스카나 지방의 노인 인구 비중의 경우 농촌에서는 약 10%였고 도시에서는 5%를 넘지 않았다.

당시는 정년퇴직 개념이나 노인복지 제도가 당연히 없었고 노년을 나이만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늙어갈수록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모르거나 늘려 말하곤 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건강이었고 노년이라서 거부된 게 아니라 병약한 상태면 소외됐다. 

건강이 허용하는 한 기사들은 60세가 넘어서도 활동했다. 1307년 프랑스 성전기사단 재판의 심문조서에 기록된 기사 40명 중 60세 이상이 10명이나 됐다. 농민들도 늙어서까지 노동을 했다. 삶을 활동과 비활동으로 단선적 구분을 했던 중세 사회에서 정말로 노쇠해 거동이 불가능한 노인은 병자, 불구자, 거지, 어린이, 무위도식하는 사람과 같은 범주로 분류됐다.

짧은 수명과 결혼 연령의 격차로 인해 노년기에는 홀아비보다 홀어미가 더 많았다. 중세처럼 젊은 혈기와 강력한 체력이 요구되는 기사-농민 사회에서는 노인이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만큼 공경을 받지 못했다. 원로정치가 발을 붙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자기 할아버지를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교육자 역할도 미미했다. 귀족층에서는 상속 문제를 놓고 젊은 자식과 늙은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귀족층에서는 죽음이 임박하면 사후 구원을 받기 위해 수도원으로 은거하여 승복을 입고 참회를 하면서 죽음과 저승으로의 통과를 준비하기도 했다. 

책장을 덮으며 든 생각은 ‘중세에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것이다. 노인을 공경하고 어른 대접하는 대한민국에서 사는 게 새삼 복처럼 느껴졌다. 노인을 존경하는 분위기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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