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망청’ 연산군, 조선왕 최고의 명필이었던 선조
‘흥청망청’ 연산군, 조선왕 최고의 명필이었던 선조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2.07 15:29
  • 호수 7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이야기[3] 연산군부터 선조까지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을 대비하지 못하고 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등의 행적으로 최악의 군주로 평가받는 선조는 조선 27대 임금 중 최고의 명필로 유명하다. 사진은 선조의 어필(御筆)을 모아 만든 병풍.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을 대비하지 못하고 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등의 행적으로 최악의 군주로 평가받는 선조는 조선 27대 임금 중 최고의 명필로 유명하다. 사진은 선조의 어필(御筆)을 모아 만든 병풍.

미녀 1만명 선발 춤‧방중술 수련시켜… 연산군 국고 탕진 후 축출  

효심 지극한 인종, 부왕 잃고 금식하다 왕위 1년도 못 채우고 승하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조선왕조에서 신하들에 의해 첫 번째로 폐위된 왕인 연산군은 영화‧드라마로 수차례 만들어질 만큼 악행이 익히 알려져 있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폭군이면서 1000명의 기생과 향락을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돈이나 물건을 마구 사용하거나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길 때 쓰는 ‘흥청망청’이란 말도 연산군에게서 유래됐다. 

재위 11년(1505), 연산군은 제조 임숭재와 병조판서 임사홍을 채홍사로 임명해 조선 팔도의 미녀 1만명과 튼튼한 말을 징집하도록 명했는데 이때 강제 입궐된 여인들을 운평이라 칭했다. 이 운평들은 살아남기 위해 춤과 노래, 방중술 등 다양한 수련에 임했는데 이 과정에서 특별히 왕에게 간택 받은 운평을 ‘흥청’이라 일컬어 상위 계급으로 명명했다. 

배우 김강우가 연산군을 연기한 영화 ‘간신’의 한 장면
배우 김강우가 연산군을 연기한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쾌락에 빠진 연산군은 정사는 멀리한 채 흥청을 늘리는 데에만 힘썼다. 방탕한 생활과 사치로 국고를 낭비한 연산군으로 인해 조선 왕조 100년 동안 쌓은 국가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지게 됐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흥청 때문에 연산군이 망했다 하여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고 후대에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중종은 초기엔 자신을 추대한 공신들을 우대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첫 아내인 신씨(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를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비시켜야 했다. 이후에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중종은 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중종 4년), 유순정(중종 6년), 성희안(중종 7년) 등이 약속이라도 한 듯 줄줄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조선 개혁의 상징적 인물인 조광조를  중용하고 자기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중종과 함께 항상 거론되는 조광조는 이순신과 더불어 조선에서 가장 빠른 승진속도로도 유명하다. 중종        10년 9월 문과에 급제한 그는 중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일 년에 두세 차례씩 승진한 끝에 중종 13년(1518)에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의 자리에 오른다. 사헌부의 대사헌은 오늘로 치면 검찰총장과 비슷한 관직이다. 즉, 검사 임용 3년 만에 총장이 된 것이다.

1544년 중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인종은 즉위한지 9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 왕 중 가장 재위기간이 짧은 왕으로 기록돼 있다. 공식 사인은 ‘부왕의 죽음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간에는 계모인 문정왕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독살을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떡을 권했는데 그 떡을 먹고 인종이 쓰러져 죽었다는 내용인데 일설일 뿐이고 실제 실록은 ‘금식’ 때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종은 효심이 지극한 왕이었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단식을 했는데 지나치게 음식을 먹지 않아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중종이 후사를 보지 못한 채 승하함에 따라 당시 12살이었던 이복동생 명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정왕후는 자신이 고대했던 목적을 이룬다. 특히 그녀는 8년 간 수렴청정(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일)을 하면서 ‘임금 위의 여왕’으로 군림한다. 

수렴청정 이후에도 왕실 외척의 폭정이 심한 탓에 명종은 22년의 재위기간 이렇다 할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을묘왜변과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 등 나라 안팎으로 혼란을 키웠다.   

명종은 중종과 달리 인순왕후를 통해 외아들 순회세자를 낳았지만 그가 14세에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중종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이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었다. 

하성군은 16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14대 임금인 선조이다. 선조는 조선 27명의 임금 중 가장 명필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가 쓴 ‘화정’(華政)이라는 글자는 아버지 선조의 필체와 매우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학문을 좋아하고 영특한 왕이었지만 선조는 국가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부족했다. 결국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국방을 튼튼히 하지 못해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조선왕조 최악의 군주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배성호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