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잘 쓴 글씨’를 넘어 ‘미술 작품’이 되기까지
서예, ‘잘 쓴 글씨’를 넘어 ‘미술 작품’이 되기까지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4.03 14:42
  • 호수 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라인으로 보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서(書)’
온라인을 통해 먼저 공개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 서예가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주요 서예가들의 작품을 통해 상세히 살펴본다. 사진은 근현대 1세대 대표 서예가 현중화가 취흥에 쓴 글씨로 유명한 ‘취시선’.
온라인을 통해 먼저 공개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 서예가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주요 서예가들의 작품을 통해 상세히 살펴본다. 사진은 근현대 1세대 대표 서예가 현중화가 취흥에 쓴 글씨로 유명한 ‘취시선’.

광복 이후 활동한 근현대 1세대 서예가 12인의 작품 등 300여점

수묵 아닌 유채로 표현한 ‘항아리와 시’, 취흥에 쓴 ‘취시선’ 등 눈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3월 12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미술관에 서(書):한국 근현대 서예전’. 현대미술관 최초 서예 단독 기획전으로 큰 관심을 받았지만 코로나19 여파로 미술관이 2월부터 휴관에 들어가면서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지난 3월 30일 마침내 전시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프라인 전시가 아닌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채널(youtube.com/MMCA Korea)을 통해 먼저 공개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서’(書)가 근대 이후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현대성을 띤 서예로 진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예, 전각, 회화, 조각, 도자, 미디어 아트, 인쇄매체 등 작품 300여 점, 자료 70여 점이 전시된다. 광복 이후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한국 근현대 서예가 1세대 12인의 작품을 비롯, 2000년대 전후 나타난 현대서예와 디자인서예 등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는 서예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다. 

배원정 학예연구사가 진행하는 90분 가량의 동영상은 이번 전시의 목적과 주요 작품을 상세하게 설명해줘 서예에 전문 지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는 크게 4부로 구성된다. 먼저 1부 ‘서예를 그리다 그림을 쓰다’에서는 3개의 소주제로 나눠 서예가 회화나 조각 등 다른 장르의 미술에 미친 영향들을 살펴봄으로써 미술관에서 ‘서’를 조명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서예가 또 다른 형태의 미술임을 설명한다.

1부의 첫 번째 소주제인 ‘시·서·화’에서는 전통의 시화일률(詩畫一律)의 개념을 계승했던 근현대 화가들이 ‘신문인화’(新文人畵)를 창출하고, 시화전의 유행을 이끌어 갔던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눈여겨볼 작품은 김환기(1913~1974)의 1954년 작 ‘항아리와 시’이다. 둥그런 달항아리와 흐드러지게 핀 하얀 매화, 단정하게 쓰인 제발(題跋, 그림 해설)이 어우러지며 화면에 운치를 더한다. 검붉은 가지들, 마치 나비인 듯 구름인 듯 날아다니는 색들이 화면에 강한 장식성을 부여해주며 김환기 특유의 미감이 담겨있는 현대적 문인화라는 평을 받는다.

두 번째 ‘문자추상’에서는 서예의 결구(結構, 글자를 이루는 획의 구성과 짜임)와 장법(章法, 지면에 문자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을 기반으로 구축된 문자적 요소가 각각의 화면 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됐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 ‘서체추상’에서는 서예의 모필(毛筆)이 갖고 있는 선질(線質)과 지속완급, 리듬, 기(氣) 등 재료의 특질들이 실제 작품에서 어떻게 발현되 반영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2부 ‘글씨가 그 사람이다’에서는 서병오(1862~1935), 손재형(1903~1981) 등 한국 근현대 서예가 1세대 12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근대 이후에 나타난 서예 문화의 변화 양상 등을 살펴본다. 12인의 작가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등 사회·문화예술의 격동기를 거치며 ‘서예의 현대화’에 앞장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립한 인물들이다. 각자 자신이 살아온 행보와 성정을 반영하여 자신만의 특장을 서예로 발휘해 온 이들의 작품을 통해서 글씨가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중 현중화(1907~1997)의 ‘취시선’이 인상적이다. 제주 서귀포에 있는 음식점 국일관에서 새로 도배된 벽에 쓴 ‘취시선’은 글자 속에 한 마리 학이 춤을 추는 듯 가늘고 긴 것 같으면서도 그 강인한 힘이 마치 전통무예 택견을 보는 듯하다. 택견은 언뜻 보기에는 춤을 추는 듯 유연해 보이나 순간의 절도와 타격을 가하면서도 결코 중심을 잃지 않는다

이어지는 ‘다시, 서예: 현대서예의 실험과 파격’에서는 1세대들에게서 서예 교육을 받았던 2세대들의 작품을 통해 그 다음 세대에서 일어난 현대서예의 새로운 실험을 살펴본다. 전통서예가 문장과 서예의 일체를 기본으로 하는 반면, 현대서예는 문장의 내용이나 문자의 가독성보다는 서예적 이미지에 집중함으로써 ‘읽는 서예’가 아닌 ‘보는 서예’로서의 기능을 더 중시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여태명(64, 원광대 교수)의 ‘천지인’이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를 잇는 인간의 형상을 한자가 아닌 상징적인 부호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필획을 통해 서예가의 예술세계를 표현하고 수많은 글자로 표현하지 못하는 서예의 상징적 요소를 추상적으로 극대화시켰다. 

마지막 ‘디자인을 입다 일상을 품다’에서는 디자인과 손을 잡은 서예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손 글씨를 이용해 구현하는 감성적인 시각예술’로 최근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와 가독성을 높이거나 보기 좋게 디자인한 문자를 일컫는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등을 소개하며 예술성에 실용성을 더한 확장된 서의 세계를 조명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서예 교과서를 만든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준비한 전시”라면서 “코로나19로 미술관 직접 방문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온라인 중계를 통해 만나는 서예전이 새로운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