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성왕조이야기 5] 숙종부터 정조까지…장희빈 아들로 태어난 경종, 4년 만에 승하 ‘독살설’
[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성왕조이야기 5] 숙종부터 정조까지…장희빈 아들로 태어난 경종, 4년 만에 승하 ‘독살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6.26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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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 없던 숙종, 수렴청정 없이 14세 때 왕좌 올라 46년 간 철권통치   

영조는 사도세자에 유독 냉혹… 정조, 즉위 직후 “난 사도세자 아들” 천

영화 ‘사도’에서 영조(오른쪽)와 왕세손 이산.
영화 ‘사도’에서 영조(오른쪽)와 왕세손 이산.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조선 태조부터 순종까지 총 27명의 왕 중 정비(계비 포함) 소생의 맏아들로 왕위에 오른 국왕은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등 7명에 불과했다. 특히 유일한 왕후에게서 난 외아들 중 왕위에 오른 건 6대 단종과 19대 숙종밖에 없다.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당한 뒤 죽임을 당했으니, 숙종은 라이벌 없는 정통성을 과시하며 왕위와 천수를 누린 유일한 조선의 임금이었다.

이는 기록으로도 나타난다. 영조 다음으로 긴 46년 동안 왕권을 지킨 숙종의 입지는 두터웠다.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마저 세자빈(왕세자의 아내), 왕후(임금의 아내), 왕대비(선왕의 아내이자 임금의 어머니)라는 코스를 밟은 유일한 왕비였다. 이런 연유로 20세 이하의 왕은 수렴청정을 해야 했지만,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직접 정치를 하며, 내공이 높은 신하들을 자기 뜻대로 주물렀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숙종은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온몸에 화증이 가득했고 성격도 괴팍해 어머니인 명성왕후조차 자신의 아들이지만 아침, 점심, 저녁으로 다르니 감당이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한겨울에도 부채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화증이 심했다고 기록돼 있다.

숙종의 첫아들로 태어난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원자로 책봉됐고 3세에 왕세자가 됐다. ‘갑술환국’(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으로 인해 남인 세력을 잃고 어머니 또한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돼 9세 때부터 어머니가 싫어하던 인현왕후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했지만 악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탄탄했던 그의 입지는 장희빈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으며 위태해진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서인의 보수세력인 노론이 지배하고 있었고, 소수인 진보세력 소론만이 경종을 지지하는 형국이었다. 게다가 숙종은 이복동생 연잉군을 지지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말 한마디 조차 조심해야 했던 경종은 말을 아꼈다. 실록에 그의 성격이 과묵하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숙종에게는 3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 아들이 한 명도 없었고 장자의 권한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세자생활 31년 만에 왕위에 오른다.

마음고생 탓인지는 몰라도 경종은 즉위한지 4년 째인 1724년 승하하고 만다. 병으로 고생하던 경종을 위해 이복동생 연잉군이 쾌차를 기원하며 게장과 감을 선물한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경종은 그날만큼은 게장과 감을 맛있게 먹었지만 다음날부터 극심한 설사에 시달리면서 건강이 악화된다. 왕의 병세가 악화되자 우왕좌왕하던 연잉군은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라고 어의에게 명하고 당시 어의들은 처방의 재료가 상극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지만 결국 인삼과 부자를 마신 경종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로 인해 남인과 소론을 중심으로 경종의 독살설은 팽배해지고 이는 일평생 연잉군, 즉 영조를 쫓아다니게 된다.

조선의 최장수 왕이자 최장 재위 기간을 기록하며 조선의 중흥을 이끈 영조는 어린 시절 임금의 길과는 멀다는 것을 알고 궁궐 밖에서 백성들과 어울려 자란다. 이 때문인지 왕이 된 이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며 백성을 아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녹두묵 등을 이용해 만드는 ‘탕평채’는 영조가 지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 재위 당시 탕평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 음식이 나오면서 탕평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탕평채에는 여러 당을 골고루 등용하겠다는 영조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데 동양에서 서쪽은 흰색, 동쪽은 푸른색, 남쪽은 붉은색, 북쪽은 검은색을 의미하며 이것은 각각 서인, 동인, 남인, 북인을 가리킨다.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임금이었지만 유독 자식인 사도세자에게만 매몰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인 이산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이산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사도세자와 달리 공부에만 열중해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치색도 드러내지 않으며 학문에만 열중했다. 이산을 보며 사도세자를 내치는 데 압장선 노론 대신들의 불안이 커져 갔다. 이를 알아차린 이산은 더욱 공부에 열중하면서 만일을 대비해 잠에 들때는 두꺼운 옷만 입었으며 첫닭이 울기 전까지 잠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산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언급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정조로서 왕위에 오르자 마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했다. 

정조는 문무 모두 출중한 기량을 보였는데 활쏘기를 잘해 50발을 쏘면 49발은 명중시키고 1발은 일부러 맞추지 않는 대범함을 보였다고 한다. 가장 글을 많이 쓴 왕 또한 정조이다. 논어의 ‘나는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한다’에 감명받아 일성록을 통해 매일 반성하는 글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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