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우남 이승만 前 대통령 ①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우남 이승만 前 대통령 ①
  • 관리자
  • 승인 2006.08.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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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조상·가문 생각하는 전통적 한국노인
하와이서 조카뻘 인수씨 아들로 입양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은)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편향성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건강 노년, 문화노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첫 번째로 이승만 전대통령을 4회 연속 게재합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이 하나 그르지 않다. 선영 주변의 반듯하고 우람한 소나무들은 목재로 베어내져 버리고, 구부러지고 못난 소나무만이 묘지 주변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는 말이다.

 

못난 자식이 똑똑하고 출세한 자식보다 부모한테 효도한다는 뜻으로 흔히 인용된다. 아마도 말년의 이승만 전대통령한테도 그런 회한이 있었던 듯싶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하루아침에 야인으로 내려온 것이 1960년 4월 29일이었다. 그러고 한 달 뒤인 5월에 젊은 시절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하와이로 거처를 옮겼다.

 

이 전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푸랜세스카라고 표기한 문헌도 있다) 여사가 생전에 남긴 회고록에 의하면, 이 전대통령은 불같이 급한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하와이에서의 욕되게 보낸 말년을 비교적 편안하게 보냈다고 한다.

 

이승만 전대통령은 독립운동사에서 그 자취가 누구보다 뚜렷한 독립투사로 해외에서 33년(구한말로부터 치면 50년 가까이)을 떠돌다 고국에 돌아와 미군정 치하에서 다시금 나라를 일으켜 세우며 대통령 지위에 올랐다.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국부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들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여느 은퇴노인들처럼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고 걱정하면서 90세, 천수를 다했다.

 

민주주의 혁명으로서의 4.19의 의미가 ‘반이승만’ 운동으로 퇴색되고 질적으로 변화됐으나 그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혹 마음에 상처를 입고 건강이 악화될 수 있을 것을 우려하여 측근에서 그 내용 모두를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에 따르면, 이 전대통령은 보름에서 한 달 정도 머무는 것으로 알고 하와이로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귀국 일정이 잡히지 않은 채 1년여가 지나자 부모님 선영을 돌볼 아들이 없어 안타깝다는 뜻을 주변에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정동교회, 공군교회 등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개신교 신자였고 서양 문물에 일찍이 눈을 뜬 선구자였으나 그 역시 조상과 가문을 생각하는 것만큼은 전통적인 한국 노인이었던 것이다.

 

“구한말 구국운동을 할 때 쫓기던 몸이 되어 어머니의 임종도 못한 불효자임을 늘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6대 독자 아들을 그리며 고생만 하다가 홀로 세상을 뜬 부친 교선공 생각도 많이 했다고 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풍운의 삶을 살았던 것이 그에게는 영광이었을지 몰라도 부모에게는 말 못할 불효가 되었음을 말년에 이르러 가슴 아파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와이 생활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이 전대통령 부부는 양자를 들이기로 한다. 그리하여 뉴욕에 있던 측근 이순영씨를 하와이로 불러 간곡히 부탁하기에 이른다. 이 전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 한때 내무부장관을 지냈던 이순영씨가 한국에 입국하자 정부는 즉각 그를 연금 조치했다.

 

이 전대통령이 무엇인가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지나 않는지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승만 전대통령의 양자를 들이기 위한 목적 외에는 달리 사심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 무사히 전주이씨 종친회 양녕대군파에 양자 추천을 부탁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곡절 끝에 이 전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조카뻘이 되는 계대를 맞춰 인수씨를 아들로 입양한다. 하와이에 머물게 된 지 일 년여 기간 중에서 그때 이 전대통령의 표정이 가장 밝았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그놈이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더 서둘러 빨리 와야 하는것 아닌가’ 하며 마음을 썼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손 없는 외로움을 탔던 어쩔 수 없는 노인이었다.

 

선영 돌볼 사람 없어 인수씨 양아들로 맞아 

 

현재, 이 전대통령의 거처였던 이화장은 그렇게 맞아들인 양아들 인수씨가 지키고 있다. 이화장의 영욕을 돌아보면 세월이 주마등 같이 흘러간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 전대통령이 하야하여 이화장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어느덧 45년여가 지났으니 집도 늙고 이 집의 아들 인수씨도 70을 훌쩍 넘긴 노인이 돼 있다. 서울시 기념물 6호로 지정돼 관리비 지원을 받은 적도 있으나 지금은 끊긴 상태다.

 

그러나 옛 자취를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보존이 잘돼 있다. 본채는 전통한옥구조로 돼 있으나 내부 시설은 서양의 입식가옥 형식을 적용하고 있다. 거실에는 페치카가 설치돼 있고, 사랑과 서재, 침실, 주방, 도우미방 등을 갖추었다.

 

이 전대통령이 거주하던 당시의 집기와 비품, 그리고 독립운동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각종 유품들, 하다못해 프란체스카 여사가 헤진 데를 여러 차례 꿰매 입은 속곳까지도 보관돼 있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으나 이름 없는 사설박물관처럼 찾아오는 관람객은 거의 없다.

 

뉴욕대 정치학 박사로 명지대 법정대학장을 지낸 이인수씨는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을 인용하면서 취재 요청에 응했다.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할 때는 이성보다 감정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에요. 내가 아무리 아버님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 하여도 기사를 쓰는 사람이 악감정을 갖고 있다면 진실은 묻히게 되지요”하는 것이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인물임에도 4.19를 야기한 독재자와 부정선거의 원흉 등의 이유로 ‘반이승만’ 감정의 골이 너무 깊게 패였다는 뜻이었다.

 

사실 민주주의를 처음 시작한 정권으로 처음 실패한 경험을 하여 국민에게 실망감과 충격이 컸다고는 하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의 18년 통치와 유신정권 등의 비민주적인 면에 비해 양반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4.19를 기념하며 반이승만 운동을 그렇게 극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인수씨는 그런 전제 하에 양아들이 되어 이승만 전대통령을 처음 만나던 당시를 이야기했다. 

 

“내가 아버님을 처음 뵌 것이 서른 살 때였습니다. 정말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습니다. 제대로 되신 선비로서의 자존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80대 중반에 이른 이 전대통령의 깐깐한 풍모가 그렇게 가슴 뿌듯하게 와 닿더라는 것이다.

 

일제하의 초등학교 시절 인수씨 역시 강제로 궁성예배를 했는데, 할아버지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은 탓에 하는 체만 했을 정도로 나름대로 항일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님 앞에서 보니 나한테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아주 많이 나는 것이에요. 아버님이 그렇게 강고해 보이고 참으로 거목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전대통령은 아들에게 입고 있는 옷과 넥타이와 신발이 어느 나라 것인지를 묻고는 그것이 모두 국산이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해 했다고 한다. 국산품으로 이렇게 입을 수 있는 것도 뜻 깊고, 아들이 외제를 입지 않고 국산을 찾아 입었던 것도 뜻깊게 여겼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이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묻고는 그런대로 “젊은 사람들이 잘해보려고 노력하니 잘 되어 갈 것입니다”라고 하자 “잘 되어간다는 말을 믿다가 나라가 절단 났다”며, “너는 잘 되어간다는 말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고 했다.

 

이인수씨는 “지금 세상은 4.19 때의 어른에 대해 정말 잘못 알고 있습니다”라면서, “늙은 내가 맞아야 할 총을 아까운 우리 학생들이 맞았다고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희생된 학생들이 입원한 병실에 찾아갔을 때, 학생들이 ‘할아버지!’하며 가슴에 안겼을 정도로 4.19 직후에도 이 전대통령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계속> 

 

박병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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