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누가 나라를 어지럽히나
[백세시대 / 세상읽기] 누가 나라를 어지럽히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07.24 14:01
  • 호수 7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직후 “박 시장님과 연수원 시절부터 참 오랜 인연을 쌓아 오신 분인데 너무 충격적”이라고 언급했다. 그것도 국민 앞에서 직접 한 것이 아니라 노영민 비서실장의 입을 통해서였다. 피해자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그런 문 대통령에 대해 국내 여론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논란이 많다. 

김태흠 미래통합당 의원은 7월 22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문 대통령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시는 분인데 왜 침묵하고 있느냐고”고 정세균 국무총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정 총리는 “대통령께서 다른 국정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을 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박원순 시장의 성희롱 사건은 현재 국내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이다. 이보다 더 뜨거운 국민 관심사가 따로 없을 텐데 대통령이 다른 일로 바빠서 말을 안 한다는 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외신도 공감하고 있다. 미국 CNN은 “문 대통령이 침묵해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파급력에 비춰볼 때 과연 대통령의 침묵은 정상일까.

문 대통령은 성 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빠짐없이 개입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성 평등 관련 공약을 발표하며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미투(Me Too) 운동이 시작된 2018년 2월,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며 피해자의 고소가 없는 경우에도 적극 수사할 것을 당부했다. 그해 7월에는 불법촬영 등 여성 대상 성범죄에 대해 “가해를 가한 것 이상의 불이익을 가해자에게 반드시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지난해 버닝썬 사건과 관련해서는 “버닝썬 클럽에서 벌어지는 일을 ‘검경이 명운을 걸고 수사하라’”고 철저한 수사를 강조했다. 김학의 전 차관의 성 접대 사건 때도 역시 “공소시효가 끝났어도 사실 여부를 가려야 한다”고 물고 늘어졌다.

문 대통령뿐만 아니라 이 정부의 편에 서 있는 진보인사들은 문 대통령과 유사한 반응들이다. 대표적인 이가 미투 운동의 불을 붙인 서지현 검사다. 조직 내 반감을 무릅쓰고 상관 성추행을 폭로했고 이후 여성 인권과 성범죄에 대해 줄기차게 목소리를 내왔다. 작년 3월, 가수 정준영 등의 집단 성폭행이 터지자 그는 “진보란 무엇인가. 강자들이 힘으로 약자들을 억압하자는 것을 끊어내자는 것 아닌가. 이건 페미니즘도 과격주의도 아니다. 그저 범죄자를 처벌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 검사는 이달 초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에 대해 미국 송환 불허 결정이 내려지자 “권위적인 개소리”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런 서 검사가 박 시장 사건에 침묵하고 있다. 지난 4월,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추행 사건 때도, 그 전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 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민주당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정치심리학의 거장인 어빙 제니스 미국 예일대 교수는 명저 ‘집단사고의 희생자’에서 강력한 응집력을 가진 조직이 내부에서 흔들리는 과정을 정확히 지적했다.

“응집력이 강한 조직은 전원 합의나 의견 일치를 중시한다. 의견 대립이나 갈등을 회피하려고 하고 특정 의견에 큰 문제가 있어도 이 의견에 동조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된다. 구성원 대부분이 이런 사고를 하면 비합리적 의견이 작동해 참사 수준의 위기가 발생한다.”

지금 청와대와 여당, 진보인사들이 자기 신념과 일치하는, 믿고 싶은 정보만 믿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함몰된 채 정의·공정·평등을 분별하지 못하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