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엔리코 페르미와 노벨상
[백세시대 / 세상읽기] 엔리코 페르미와 노벨상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08.14 14:38
  • 호수 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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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어느 날 미국 시카고대의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시카고에 사는 피아노 조율사는 몇 명일까’라고 물었다. 학생들이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대답을 못하자 이 교수는 그럴듯한 상상력을 동원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시카고에는 약 300만명이 살고 한 가구에는 평균 3명이 있으므로 시카고에는 약 100만 가구가 살고 있다. 피아노를 가진 집이 약 10%라고 가정할 때 시카고에는 10만대의 피아노가 있다. 피아노 조율사는 피아노 1대를 조율하는데 2시간이 걸린다고 할 때 이동시간까지 포함한다면 하루 최대 4대의 피아노를 조율 할 수 있다. 피아노 조율사 한 사람이 주5일, 50주를 일한다고 가정하면 피아노 조율사 한 사람은 1년에 1000대(4×5×50)를 조율한다. 피아노가 있는 각 가정에서 1년에 최대 1번씩 조율을 한다고 할 때 조율사는 모두 100명이다.”

실제로 이 숫자는 시카고 전화번호부에 올라있던 피아노 조율사 전화번호 수와 근사한 수치였다고 한다.

이 교수가 바로 ‘원자핵 시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엔리코 페르미(1902~1954년)이다. 그는 이탈리아 물리학자로 중성자에 의한 우라늄 충격실험으로 초우라늄원소를 발견해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가 남긴 업적은 워낙 광범위해 물리학 거의 모든 분야의 용어에 등장한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페르미온, 그러한 입자를 계산하는 방법인 페르미-디랙 통계, 핵물리학의 기본 단위로 흔히 쓰이는 페르미(1페르미=1천조분의 1미터) 등이다. 

물리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끊임없이 페르미란 이름을 듣고 물리학자들은 매일 페르미의 이름을 언급한다. 페르미 이름을 붙인 대상도 많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가속기를 가진 미국의 국립연구소 페르미랩, NASA가 발사한 페르미 감마선 우주망원경, 원자번호 100번인 원소 페르미움,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과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상 중 하나인 엔리코 페르미 상 등이 그것이다. 

그에 대한 평전은 많지 않다. 그런데 그가 평소 노벨상을 받고 싶어 했고 시상식을 틈타 파시스트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비화가 최근 발간된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김영사)에 자세히 소개됐다.

페르미는 선후배, 동료로부터 노벨상 후보 추천을 36번 받았다. 그는 과학자 닐스 보어로부터 노벨상 수상자가 될 것이란 힌트를 받고는 로마를 떠나 미국에 정착할 계획을 세운다. 신세계(미국)에서 새 출발하는데 많은 돈이 필요했던 페르미는 노벨상 상금에도 무관심할 수 없었다. 당시 상으로 주는 금메달은 45돈이 조금 넘으며 미화로 50만 달러에 달했다. 

페르미는 스톡홀름 노벨상위원회로부터 걸려오는 국제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렸고 단독 수상 연락을 받고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또 다른 문제는 아내의 신분(유태인)이었다. 스톡홀름에 가려면 기차로 독일을 경유해야 했다. 아내의 여권에 유태인 표시가 있어 독일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르미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로마의 한 성당에서 종교 결혼식을 올리고 여권을 새로 발급받아야 했다. 

이들은 무사히 독일 국경을 통과해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페르미는 그해의 다른 수상자 펄 벅 여사와 나란히 무대에 앉았다. 그는 상을 받는 순간도 걱정했다. 수상자가 상을 받으러 스웨덴 왕에게 다가갈 때나 자리로 돌아갈 때도 등을 보이면 안됐다. 페르미는 후에 자신이 왕에게 다가갈 때 세심하게 걸음 수를 세었다가 악수를 하고 메달과 상장을 받은 다음에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던 일을 사람들에게 자주 얘기하곤 했다. 그는 위암으로 사망하기 직전에도 자신의 팔에 꽂힌 수액 주사의 방울 수를 세면서 수액의 흐름을 측정하기도 했다.  

페르미 부부는 축하와 연회를 뒤로 하고 코펜하겐에서 보어에게 경의를 표한 후 영국 해협을 건너 사우샘프턴에서 뉴욕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페르미는 무사히 미국에 도착해 컬럼비아대, 시카고대 교수로 재직하며 핵에너지 해방이라는 업적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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