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또 잠을 설쳤다 /엄을순
[백세시대 / 금요칼럼] 또 잠을 설쳤다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0.08.14 14:42
  • 호수 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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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이 내게 올 줄 몰랐는데

밤에 자꾸 깨고 잠을 설치게 돼

낮엔 기운이 없고 눕고만 싶어

몸이 힘들면 잠이 오려나 

오늘은 잡초를 뽑을 생각

또 밤이 왔다. 깊고 길고 까만 밤. 어젯밤도 잠을 설쳤는데 오늘도 숙면은 포기해야 할 듯. 내 머릿속에는 스톱워치가 들어있다. 한참을 자다가 시계를 보면 한 시. 다시 깨어 시계를 보면 한  시 반. 세 시. 째깍째깍. 세 시 반. 어느 때는 우연인지 그 무얼 암시하는 건지 정확한 간격으로 깰 때도 있다.

네 시 반. 제일 먼저 닭이 울고 그다음에 하나둘씩 매미가 울고, 뒤이어 새들이 울기 시작하면 창호지에 비친 백열등처럼 저기 저 잣나무 뒤부터 어렴풋이 날이 밝아온다. 이렇게 밤을 지새운 다음 날은 온종일 정신이 몽롱하다. 

불면증. 이런 건 고민거리가 많은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병인 줄 알았는데 나처럼 머리를 비우고 사는 사람에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 왕성하던 식욕도 없고 기운도 없고 자꾸만 바닥에 눕고만 싶다. 낮잠을 자서 그런가. 낮에 소파에 뒹굴뒹굴 누워만 있어서 그런가. 어쩌면 늦은 저녁에 홍삼을 먹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홍삼이 각성제 역할을 한다지 않던가.

치사하게 억지로 잠을 청하느라 기운 빼지 말고 차라리 TV를 보자. TV를 틀었다. 이 밤에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많은가. 나오는 건 모조리 홈쇼핑 채널뿐이다.

영화를 보자. 이리저리 넷플릭스를 뒤져 양평의 잠 못 드는 밤에 보면 딱 좋은 영화를 하나 찾아냈다. 세상 참 좋아졌구나. Our Souls at Night(아워 소울즈 앳 나이트). 번역하자면 ‘밤에 우리의 영혼은’이다. 3년 전 제작된 영화로서 제인 폰다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은 노인들의 외로운 밤이 주제인데 미국인 작가 켄트 하루프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란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미국 콜로라도주 동부 작은 마을에 홀로 사는 노인 로버트 레드포드의 집에, 바로 그 이웃에 홀로 사는 노인 제인 폰다가 갑자기 찾아온다. 두 사람은 평소에 눈인사만 주고받을 뿐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녀가 불쑥 그에게 내민 제안은, ‘언제 자신의 집에 와서 같이 자자’였다. 

당황스러운 로버트 레드포드. 뭘 하자는 게 아니라 혼자서 밤을 보내려면 너무 외로우니 서로 얘기나 나누며 잠을 청하자는 말이라며 뜻이 있으면 언제 밤에 오라는 말을 하고는 가 버린다. 며칠간 고민한 끝에 제인 폰다의 제안을 받아들인 로버트 레드포드는 그녀의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시작한다. 이웃들의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은 늘어가고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낮에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도 하고 속 얘기도 하고 춤도 추고. 시작은 그저 ‘밤의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함께 시간 보내기’였으나 둘은 차차 사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랑을 지속하기에는 주위에 장벽이 너무 많다. 결국 제인 폰다는 아들의 심한 반대 때문에 멀리 떨어진 아들 집으로 이사를 하고. 핸드폰이 망가져서 소통이 힘든 제인 폰다에게 로버트 레드포드는 핸드폰을 선물한다.

물리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둘은 매일 밤 전화로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어찌 생각해보면 둘이 만나서 밤을 보내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애틋하기도 하다. 영화는 노인 둘이 늦은 나이에 새로 만나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 흔히 겪는 문제들을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2025년에는 우리나라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이나 된단다. 부부가 임종을 함께하는 게 아닌 이상 홀로 된 노인들은 차고 넘치고, 나이 들면 잠을 설치는 불면증 환자가 절반도 넘는다는데 그들의 밤은 도대체 누가 챙겨주나.

먼 곳에서 닭이 울기 시작한다. 노인을 위한 ‘밤을 잊은 그대에게’ 유튜브 방송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잠 못 이루는 노인들끼리 소통이라도 해볼까나. 잠 못 이루는 제인 폰다와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노인 인구가 사방 천지에 얼마나 많겠는가. 에이. 오늘은 종일 마당에서 잡초나 뽑아야겠다. ‘몸이 힘들면 내일은 좀 잘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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