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69세’…‘성폭행 사각지대’ 노인의 인권 환기시켜
영화 ‘69세’…‘성폭행 사각지대’ 노인의 인권 환기시켜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8.14 15:44
  • 호수 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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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은 그간 자주 논의 되지 않았던 노인 대상 성범죄 문제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사진은 주인공 '효정'을 연기한 예수정(왼쪽 남색 옷)과 극 중 한 장면.
이번 작품은 그간 자주 논의 되지 않았던 노인 대상 성범죄 문제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사진은 주인공 '효정'을 연기한 예수정(왼쪽 남색 옷)과 극 중 한 장면.

치료받다 성폭행 당한 ‘효정’ 통해 노인 대상 성범죄의 심각성 다뤄

피해 여성 노인의 심리 묘사로 공감 얻어… 예수정‧기주봉 등 열연

[백세시대=배성호기자] 2002년 개봉한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는 노인의 성(性)을 파격적으로 다루며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노골적인 성애 묘사를 본 일부 관객은 ‘역겹다’는 표현까지 쓰며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 실제 노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는 찬사도 많다. 현재진행형 논쟁을 통해 이 작품은 음지에 있던 노인의 성을 양지로 끌어내면서 노인들도 육체적 사랑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노인의 성’만큼이나 관심을 받지 못했던 ‘노인 대상 성범죄’를 다룬 영화 한 편이 개봉한다. 8월 20일 개봉하는 ‘69세’(감독 임선애)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한 여성 노인을 통해 우리 사회의 그릇된 편견을 꼬집으며 ‘노인 대상 성범죄’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영화는 앳된 목소리를 가진 젊은 남성과 한 여성 노인의 대화로 시작된다. 이때 화면에는 아무 영상도 출력되지 않고 목소리만 흘러나온다. 간호조무사로 추정되는 젊은 남성은 여성 노인에게 “다리가 참 예쁘다”며 성희롱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여성 노인은 이를 칭찬으로만 받아들인다. 젊은 남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성적 표현에 수위를 높여 나가고 여성 노인이 이상함을 감지하면서 둘 사이 대화는 묘한 긴장감이 연출된다.

이어 화면에 등장하는 여성 노인 ‘효정’(예수정 분)은 ‘동인’(기주봉 분)의 부축을 받으며 퇴원한다. 효정은 유일한 혈육인 딸과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독거노인이지만 병간호를 하다 알게 된 동인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고된 요양보호사 일을 관두고 동인과 작은 책방을 함께 운영하던 그녀는 어느 날 오십견 치료를 위해 입원했다가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 분)에게 몹쓸 짓을 당한다. 

몇 날 며칠 고민하던 그녀는 용기를 내 경찰서로 향해 중호를 고소하게 된다. 하지만 수사를 맡은 담당형사를 비롯해 효정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20대 젊은 남자가 뭐가 아쉬워 노인을 성폭행하겠냐, 그건 과도한 친절’이라는 그릇된 편견에 시달린다. 

이에 효정은 구체적인 물증도 제시하지만 법원에서 번번이 구속영장이 기각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경찰은 가해자 중호의 진술을 바탕으로 합의 하에 한 관계를 치매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며 그녀를 몰아붙인다.

여기에 더해 그녀를 지지하고 함께 싸워주던 동인이 사고로 다치자 효정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여기고 그의 곁을 떠나 잠적한다. 그 사이 사건은 간호조무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점차 흘러가고 진실을 밝히려는 효정의 삶도 피폐해져만 간다. 

이 작품에서 묘사하듯 실제 우리나라에서 여성 대상 성범죄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60세 이상 대상 성범죄는 765건으로 2014년 493건보다 55%나 증가했다. 

이는 하루 평균 2명 이상의 노인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셈이다. 지난 6월에는 고령의 노인들을 노려 연쇄 성폭행을 저지른 50대 용의자가 검거되기도 했다. 그는 3월부터 검거 직전까지 무려 5명의 노인들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 

이 작품은 이처럼 성범죄에 희생된 여성 노인의 심리를 묘사하고 그가 받는 사회적 편견을 비판하면서 ‘노인 대상 성범죄’를 양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다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보통 성범죄를 다룬 작품들은 범죄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잔혹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몇몇 작품은 관객이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묘사해 비판받기도 했다. 반면 이 작품은 정반대로 효정의 손목에 든 멍이 전부일 정도로 철저히 숨긴다. 초반부에는 효정을 피해자로 여기지만 중호가 반론을 제기한 중반 이후에도 추가적인 피해 장면이 묘사되지 않으면서 과연 그녀는 피해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효정이 편견에 맞서는 과정도 긴 아쉬움이 남는다. 초반에 경찰서에 직접 찾아가 예시문을 보면서 고소장을 작성하는 장면, 조사과정에서 편견에 사로잡힌 경찰에게 상처받는 장면, 성폭력센터를 찾아가 10대 소녀와 마주치는 장면 등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인의 사고 이후 효정의 행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본인이 탐정이 되듯 사건을 파헤치는 장면에서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정을 연기한 예수정과 동인 역을 맡은 기주봉 등 주‧조연 배우들의 담백한 연기는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예수정은 성범죄 피해를 대놓고 드러낼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심리를 절제된 눈빛 연기로 잘 표현해냈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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