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진주라 천리 길’의 가수, 이규남 / 이동순
[백세시대 / 금요칼럼] ‘진주라 천리 길’의 가수, 이규남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09.18 14:27
  • 호수 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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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日유학 성악가 출신 임헌익은

예명 이규남으로 대중가수 데뷔

1941년 발표된 ‘진주라 천리 길’

불후의 명곡으로 사랑받아

6‧25 때 납북된 뒤로 잊혀져

여러분께서는 ‘진주라 천리 길’이란 노래를 기억하시는지요? 나뭇잎이 뚝뚝 떨어져 땅바닥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늦가을 무렵에 듣던 그 노래는 듣는 이의 가슴을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 쓰리고도 애절하게 만들었지요. 1절을 부른 다음 가수가 직접 중간에 삽입한 세리프를 들을 때면 그야말로 눈가에 촉촉한 것이 배어나기도 했답니다. 

오늘은 식민지 후반기의 절창으로 손꼽히는 ‘진주라 천리 길’, 이 노래를 불렀던 가수 이규남(李圭南: 1910∼1974)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자 합니다.

성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윤심덕, 채규엽, 왕수복 등과 같은 또 하나의 사례로 우리는 이규남(본명 임헌익)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규남에 대한 전기적 자료가 우리에겐 그다지 친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북 분단 시기에 그는 어떤 연고로 하여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가수 이규남은 1910년 충남 연기군 남면 월산리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임헌익이었고, 처음에 본명으로 음반을 발표하다가 이후 본격적 활동을 펼치면서 예명으로 이규남을 쓰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한때 윤건혁이란 예명을 쓰기도 했으니 도합 세 가지의 이름을 썼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1935년 7월 초순, 일본 유학 중이던 성악가 세 사람이 조선일보 주최 콘서트에 초청을 받아 출연하게 되는데, 이때 임헌익도 김안라, 김영일, 장비 등과 함께 성악가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미 임헌익의 일본 데뷔 사실을 알고 있던 서울의 빅타레코드사에서는 작곡가 전수린을 앞세워 마침내 그와 전속계약을 맺습니다. 이렇게 하여 임헌익은 아예 서울에 머물며 빅타레코드사 전속 가수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1936년은 임헌익이 윤건혁이란 예명을 잠시 쓰다가 이규남이란 또 다른 예명으로 서울에서 대중가수로서의 본격 데뷔를 했던 해입니다. 한 사람의 성악가로서 대중가수가 되기까지 겪었을 마음속의 주저와 갈등이 숱한 예명에서 느껴집니다. 이제는 본명 임헌익, 그리고 예명 윤건혁을 뒤로 하고 이규남이란 또 새로운 예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수 이규남은 빅타레코드 전속이 되어서 1936년 한 해 동안 무려 19곡의 유행가 가요작품을 발표합니다. ‘고달픈 신세’가 데뷔곡이었고, ‘봄비 오는 밤’, ‘나그네 사랑’, ‘봄노래’, ‘가오리’, ‘내가 만일 여자라면’, ‘명랑한 하늘 아래’, ‘주점의 룸바’, ‘한숨’, ‘아랫마을 탄실이’, ‘사막의 려인(旅人)’, ‘골목의 오전 일곱 시’ 등이 바로 그 곡목들입니다. 

이규남은 1940년까지 빅타레코드사에서 수십여 편의 가요작품을 취입 발표합니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이 시기에 이규남이 ‘골목의 오전 7시’, ‘눅거리 음식점’ 등과 같은 만요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규남의 창법과 음색의 특징이 광범한 보편성을 지녔고, 어떤 노래를 취입해도 대개 잘 소화를 시켰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1941년, 이규남은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서 불후의 명곡인 신가요 ‘진주라 천리 길’(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 콜럼비아 40875)을 발표합니다.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 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본다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군국주의 체제의 시달림 속에서 허덕이는 식민지 백성들은 이 노래 한 곡으로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서러움과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규남은 식민지 시절 일본 유학의 학비를 벌기 위해 진주의 재래시장에서 유성기 음반과 바늘을 팔았습니다. 작곡가 이면상이 진주에 갔다가 이 광경을 보았고, 서울에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작사가 조명암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깊은 감동을 한 조명암은 즉시 노랫말을 지었고, 이면상이 바로 곡을 붙였습니다. 그리곤 이규남에게 이 노래를 취입하도록 연결했던 것이지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규남은 북으로 납치되어가서 북한 정권에 이용을 당하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일단 내무성 예술단 소속으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계속 이어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작곡과 무대예술 분야에서도 약간의 활동 흔적이 보입니다. 북한에서 발간된 가요사 자료는 1974년에 이규남이 사망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남과 북은 갈라져 있지만 ‘진주라 천리 길’의 애절한 가락과 여운은 지금도 우리 귀에 잔잔히 남아있습니다.

해마다 경남 진주에서는 남강에 화려한 꽃등을 띄우고 즐기는 유등축제를 열고 있는데, 강변 어디에서도 노래 ‘진주라 천리 길’이나 이규남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남강 둑이나 강으로 가는 길목 어디쯤 ‘진주라 천리 길’ 가사를 새긴 조촐한 노래비라도 하나 세우게 된다면 진주시민들로서는 얼마나 자랑이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우리가 잊고 지낸 한국 근대 대중문화의 소중한 자료를 되찾아서 마음에 아로새기는 즐거운 쾌거가 될 것입니다. 과연 어떤 분이 냉큼 나서서 두 팔 걷어붙이고 이 뜻깊고도 귀한 일을 해주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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