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로 다시보는 한국 명작영화 6] 만추(1982), 늦가을, 여죄수와 쫓기는 청년의 시한부 사랑
[유튜브로 다시보는 한국 명작영화 6] 만추(1982), 늦가을, 여죄수와 쫓기는 청년의 시한부 사랑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9.18 14:47
  • 호수 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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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이 소실된 이만희 감독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김수용 감독의 '만추'는 여죄수와 도망자의 3일 간의 짧은 사랑을 감각적으로 다룬다. 사진은 극중 민기를 연기한 정동환(왼쪽)과 혜림으로 분한 김혜자의 모습.
필름이 소실된 이만희 감독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김수용 감독의 '만추'는 여죄수와 도망자의 3일 간의 짧은 사랑을 감각적으로 다룬다. 사진은 극중 민기를 연기한 정동환(왼쪽)과 혜림으로 분한 김혜자의 모습.

이만희 감독의 원작을 김수용 감독이 리메이크… 김혜자‧정동환 주연   

눈빛‧표정‧소품 활용한 감각적 심리묘사… 마닐라영화제 여우주연상

[백세시대=배성호기자] 낙엽이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늦가을, 머리까지 목도리로 감싼 한 여인이 쓸쓸히 호숫가 벤치에 앉아 있다. 한없이 처량하기까지 한 그녀의 눈빛은 갈피를 못 찾고 주변을 멍하니 둘러본다. 답답함을 덜어내려 한 개비의 담배를 물지만 채 반도 피지 않고 내던진다. 끝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그녀, 혜림(김혜자 분)은 이렇게 내뱉는다. 

“그 사람 반드시 와. 꼭 와줄 거야. 그때도 그랬으니까.”

김수용 감독의 100번째 연출작인 ‘만추’ (1982)는 김혜자의 인상적인 눈빛 연기와 함께 시작한다. 만추는 한국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천재감독’으로 추앙받던 이만희 감독(1931∼75)의 1966년작을 시작으로 무려 4번이나 영화로 제작된 작품이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동시대 영화들이 대사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과 달리 달리 수려한 영상미와 섬세한 심리 묘사를 보여주며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필름을 분실해 현재는 원본이 남지 않은 전설적인 작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 1982년 김수용 감독의 ‘만추’, 그리고 2010년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까지 10년에 한번 꼴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당대 주목받는 감독들이 연출을 결심하게 한 데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한몫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추’는 늦가을에 며칠 간의 휴가를 얻은 여자 죄수가 무언가에 쫓기는 청년과 나누는 찰나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4번이나 제작되는 동안 주인공의 이름과 설정 등은 조금씩 변했지만 이야기의 큰 틀은 유지하고 있다. 짧아서 더 애절한 남녀의 사랑이 늦가을 풍경과 어울리며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김수용 감독의 만추는 출소한 혜림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2년 전 일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녀는 형기를 2년 남기고 특별 휴가를 얻는다. 8년 만에 세상에 나온 혜림은 급격하게 달라진 바깥 세상의 모습에 당황한다. 거리에는 디스코 음악이 유행을 하고 극장에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성애영화 간판이 버젓이 걸려 있다. 밖으로 나와 되레 불안함을 느낀 그녀는 자신에게 잠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권한을 준 교도관(여운계 분)을 따라 어머니의 산소를 방문하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이 기차에서 혜림은 범죄조직에 휘말려 쫓기고 있는 청년 민기(정동환 분)를 만나게 된다. 민기의 집요한 접근으로 수형 생활 중 얼어붙었던 가슴이 녹아내린 혜림은 돌아가는 기차에서 민기와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민기가 혜림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권유하지만 그녀가 이를 뿌리친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교도소 앞에서 안타까운 이별을 한다. 혜림과 민기는 2년 후 호숫가 공원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혜림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출소 후 눈을 맞으며 민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민기는 이미 경찰에 체포돼 차디찬 형무소에 갇혀 있다. 혜림은 결국 기다림에 지쳐 상처받은 가슴을 안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난다.

이 작품은 1982년 2월 스카라극장에서 개봉했지만 당시에는 안소영의 ‘애마부인’이 전국의 극장가를 강타한 시기였다. 결국 애마부인에 밀려 2주만에 막을 내리는 수모를 당하면서 ‘흥행참패’를 한다. 하지만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제21회 대종상에서 각본상과 촬영상을 수상했다. 김혜자는 마닐라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남녀의 복잡한 심리를 감각적인 영상미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늦가을이라는 쓸쓸한 배경을 바탕으로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심리를 눈빛과 표정, 소품들을 적절히 사용해 대사가 아닌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혜림이 열차 안에서 민기와 키스를 할 때는 발끝을 클로즈업하고, 두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달리면서 덜컥거리는 기차의 바퀴와 차량 연결 부분을 보여준다. 특히 혜림이 형무소로 돌아가기 직전 그녀의 목에 감아준 검은 목도리는 두 사람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원로배우들의 젊은 시절을 다시 보는 것도 새롭다. 이제는 ‘국민 엄마’로 더 유명한 김혜자는 베드신을 비롯해 제한된 시간에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혜림’ 역을 완벽히 소화해낸다. 대사가 거의 없이 눈빛과 표정으로만 복잡한 심리 묘사를 보여준다. 아버지 연기를 많이 하는 정동환과 작고한 여운계의 젊은 시절 모습도 반갑게 다가온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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