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술에 대한 단상
[백세시대 / 세상읽기] 술에 대한 단상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10.08 18:38
  • 호수 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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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는 술에 관해선 후하다. 후하다는 말은 ‘인심 좋다’, ‘넉넉히 베푼다’고 할 때 쓰지만 여기선 관용을 베푼다는 의미다. 

1980~1990년 신문사 사무실 풍경은 우주 밖의 세상이었다. 일과 시간에 술을 먹고 들어와도, 점심 때 얼큰하게 취해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낮잠을 자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고 그걸 또 나쁘게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 국장은 늘 그렇지” 하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어느 날 술을 먹지 않고 민낯으로 들어오면 “어, 오늘은 왜? 무슨 일이 있나보군”이라며 걱정까지 해줄 정도였다.

한낮의 신문사 사무실은 한가롭다. 기자들은 순한 양처럼 책상에 얌전히 앉아  읽고 쓰고 생각하는 표정들이다. 취재 나간 기자들의 빈 책상이 곳곳에 눈에 띄고 자리를 지키는 이들도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슬리퍼를 찍찍 끌며 느리게 움직여 뭐랄까, 마치 폐업 직전의 가게 또는 시장의 파장 분위기다. 가끔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사무실 정적을 깨지만 상대방과 통화하는 목소리도 크게 들리지 않는다.  

신문사에선 밤마다 활극이 펼쳐진다. 기자들은 마감을 한 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하면서 반주 삼아 술을 마시곤 한다. 뒤이어 2차, 3차로 술자리가 커지면서 사달이 난다. 새벽 2~3시, 인사불성이 된 기자들이 골목에서 상의를 벗어던진 채 난투극을 벌인다. 동료끼리 쌓인 속 감정을 밖으로 꺼내놓고 전후 맥락을 따지다 주먹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사무실에선 복종만 하던 착한(?) 후배가 돌변해 선배에게 대들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정이 다된 시각, 만취 상태의 부장은 그대로 귀가했으면 좋았는데 그러지를 않고 신문사로 복귀해 직장생활의 최대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동료보다 승진이 늦어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자를 던지고 책상 위에 올라가 소변을 보기까지 한 것이다.  아무리 술에 관대한 신문사라도 그 일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 부장은 바로 별 볼일 없는 자리로 좌천당했다.     

신기한 건 난투극 다음날 사무실이 늘 그렇듯 평온하다는 점이다. 당사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정상 출근해 다소곳한 자세로 책상에 앉아 일을 한다. 신문사의 불문율 가운데 하나가 ‘회식 다음날 정시 출근’이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자격 미달의 기자 취급을 받는다. 사우나를 가더라도 먼저 사무실에 얼굴을 보여야 한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도 종종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술고래=능력 있는 기자’이다. 회식 자리에서 “전 술을 못해요”라며 술잔을 사양하면 상사는 “시시하군, 남자가 술도 못하다니…”라면서 위력으로 술을 먹도록 만든다. 그러면서 “술 못 마시는 기자는 특종도 못 하더라”라는 식의 근거 없는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이제는 신문사도 술에 관대하지 않다. 낮술을 먹고 들어와 코를 골며 자는 국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술자리가 새벽까지 이어지는 일도 거의 없으며 한밤중 난투극도 사라졌다. 사람과의 접촉보다 스마트폰 같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대의 직장인들 사이에 난장판 술자리는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말술을 자랑했던 작가 마치다 고가 술 끊은 경험을 토로한 책 ‘술은 잘못이 없다’(팩토리나인)가 일본서 화제다. 이 작가는 가수, 배우 활동을 하다 어느 날 돌연 시집을 내면서 시인으로 데뷔했다. 그는 첫 소설로 일본의 노마문예신인상을 수상했고 두 번째 소설로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다카와상을, 세 번째 펴낸 소설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상을 받았다. 

그는 “술을 끊으니 안주를 먹지 않아도 됐고 극도로 검소한 식사를 하자 체중이 8kg 빠졌다”고 했다. 매일 소비하던 술값이 나가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덜 시달리게 됐다. 가장 큰 이득은 ‘뇌까지 좋아졌다’는 느낌이다. 필름이 끊기는 일이 없자 기억이 잘 난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는 이런 말로 책을 갈무리 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현명하지 않은 사람이 현명해지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술을 마시면 현명한 사람이 바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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