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명성황후의 그날’ 목격한 외국인들
[백세시대 / 세상읽기] ‘명성황후의 그날’ 목격한 외국인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10.23 13:59
  • 호수 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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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그날’을 목격한 이는 외국인들이었다. 한 명은 러시아인으로 이름은 아파니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1860~1921)이다. 다른 한명은, 정확히 말하면 가담자였다. 이름은 이시즈카 에조. 

사바틴은 재주가 많은 인물로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을 비롯 우리나라 근대 건축물이 그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1883년 조선에 온 뒤로 러시아공사관과 독립문(사적 제23호), 덕수궁 정관헌·중명전, 경복궁 관문각, 손탁호텔 등을 설계 또는 시공했다. 

그는 1895년 10월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 직전 일본의 경복궁 침입사건으로 불안에 시달리던 고종은 9월부터 경복궁 시위대 지휘를 외국인에게 맡겼다. 그 외국인 중 한 명이 사바틴(시위대 부대장)이다. 

그는 운명의 그날 10월 8일 새벽에 궁궐 숙직 중 을미사변을 맞는다. 을미사변이란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돼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을 말한다. 

사바틴은 명성황후가 기거하고 있던 경복궁 곤녕합 동행각에서 벌어진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에 대해 “일본 자객 중 4~5명은 칼을 뽑았고, 긴 칼을 찬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했다…20~25명의 자객들은 곤녕합 마루를 넘어…방을 샅샅이 뒤지면서 명성황후를 찾았다”고 증언했다.

간신히 현장을 빠져나온 사바틴은 주한러시아공사 카를 이바노치비 베베르에게 사건 전모를 증언했다. 그러나 사바틴은 가장 결정적인 암살 과정은 목격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현장을 목격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다. 한 역사학자는 “여러 자료를 토대로 보면 사바틴은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순간을 목격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만약 사실대로 증언했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즈카 에조는 명성황후 시해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낭인이다. 그는 조선 정부 내부(內部·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직책은 실제로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등청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낭인들이 명목 상 하나씩 가지고 있던 그런 직책이다.

명성황후 살해 당시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에조는 시해사건 직후에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마에게 별도로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다. 이른바 일본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에조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당시 현장 총지휘자인 미우라 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전직 상사에게 직접 올린 것이다.

사건의 원인에서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돼 있는 이 보고서에는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히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즉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 보고서에 적나라한 사체 능욕 장면이 나온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문화재청은 한․러 수교 30주년을 맞아 11월 11일까지 덕수궁 중명전에서 ‘1883년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 제하의 전시를 하고 있다. 이 전시는 을미사변의 목격자 사바틴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러시아공관 전체 모형, 준공을 못 본 대한제국 황제 사저, 공사관 공사대금을 요청하는 사바틴의 청원서 등 희귀한 자료들을 선보인다. 

치욕과 굴욕으로 점철된 한·일간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가서 봐야할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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