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조선에도 ‘여경’(女警)이 있었다
[백세시대 / 세상읽기] 조선에도 ‘여경’(女警)이 있었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11.06 13:41
  • 호수 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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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경찰청의 전신은 경시청이다. 1907년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치면서 경무청을 경시청으로 바꾸고 경찰의 계급 호칭도 종래의 경무관, 총순, 순검을 일본식인 경시, 경부, 순사로 고쳤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어르신이 경찰관을 호칭할 때 부르던 그 ‘순사’이다.

그럼 조선시대의 경찰청은 무엇일까. 바로 포도청이다. 과거나 현재나 국민은 경찰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다. 특히 영화나 역사소설에 등장하는 포도청은 백성에게 적(?)으로까지 간주될 정도로 악명이 높다. 

포도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성종 때 도적의 발호를 막기 위해 만든 포도장이 중종 때 포도청으로 승격돼 고종 31년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존속했다. 파리경찰청과 런던경찰청이 1829년에 출범한 것에 비하면 무려 3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포도청이란 명칭은 1545년(중종 39)에 처음 실록에 나타난다. 포도대장의 영이 서지 않자 포도대장 황형에게 가벼운 죄는 직접 결단하게 하고 조치를 부지런히 따르지 않는 수령도 임금에게 파출을 청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포도청 직제는 포도대장 좌우 각 1인, 포도부장 각 3인, 포도군관 각 10인, 포도군사 각 50인(곧 97인으로 증원됨)으로 정했다. 포도청의 군관을 포교라 하고 군사를 포졸이라 불렀다가 조선 말기에 순교라 개칭했다.  

포도청의 관할구역은 도성 및 성저 10리 일대와 경기도에 한했다. 좌포도청은 서울의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했고 우포도청은 서울의 서·북부와 경기우도를 관할했다. 지방의 포도청은 따로 중영청이라고 했다. 

포도청의 직무는 도적과 간악한 소인을 수색·체포하고 어보(御寶) 위조를 감시하고 야경을 도는 것이다. 포도대장의 임무는 국왕 행차 시 가마를 호위하고 친국이나 정국을 할 때 참석하며 실화된 곳에 급히 달려가 화재를 구하고 도적을 금한 뒤에 화급히 재산상 피해 목록을 만든다. 포도대장은 죄인이 궁궐이나 재상집에 숨었다 할지라도 곧 들어가 체포할 수 있다.  

포도청에는 오늘의 여경에 해당하는 여자포졸 ‘다모’가 있었다. ‘다모’는 여자 도적을 잡는데 일익을 담당했고 양반집 수색에도 이용했다. 포도청에서 다모를 뽑을 때는 키가 5척은 넘어야 하고 쌀 닷 말은 가볍게 들며 막걸리 세 사발은 숨도 쉬지 않고 마셔야 한다. 

다모의 활약상도 기록에 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난 때 다모가 최영경을 잡아왔고, 효종 때 김자점과 심기원이 역모를 꾀할 때도 다모가 정탐을 하고 난 후 포교가 범인을 잡아들였다.   

조선은 각종 범죄 예방과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통행금지를 엄격히 지켰다. 종각의 대종을 28회 울려 통행금지를 알렸는데 이를 인경이라고 한다. 새벽 해제는 종을 33회 쳤다. 이를 파루라고 한다. 경성 각 대문은 인경에 닫고 파루에 열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대략 오후 10시~오전 4시이다.

포도청의 범죄수사기록도 현존한다. 영조~고종 대까지를 기록한 것으로 인삼 밀매, 국경의 잠상(潛商·법령으로 금지한 물건을 몰래 팔고 사는 행위), 밀도살, 방화 등 온갖 사회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천주교 박해 때의 신문 기록에는 ‘죽으면 바로 천당에 가니 죽여 달라’는 애절한 소원도 보인다. 

“네 죄는 네가 알렸다’고 곤장을 내리치고 백성을 육모방망이로 두들겨 패는 기관으로 곧잘 묘사되는 것도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거쳐 내려온 잘못된 인식이라는 얘기가 있다.  

포도청이 조선 치안의 말단 조직으로서 백성의 안위와 왕권 수호를 위해 나름 애를 썼다는 역사적 기록을 대하니 반갑기도 하다. 이 글은 ‘조선경찰’(허남오·가람기획)을 바탕으로 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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