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125년 된 최초의 극장
[백세시대 / 세상읽기] 125년 된 최초의 극장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11.20 14:33
  • 호수 7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한 지인은 모임에서 ‘스포일러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말과 함께 몰상식하고 무식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스포일러는 영화나 소설의 줄거리를 미리 밝히는 행위나 행위자를 말한다. 지인은 그 자리에서 영화 얘기가 나오자 ‘끝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 앞에서 자세한 줄거리나 엔딩 부분을 미리 밝히는 건 예의도, 배려심도 없는 행동으로 낙인(?)찍힌다. 

노인 세대에겐 스포일러가 흥미진진한 대화거리였다. 누군가 영화를 봤다고 하면 으레 ‘끝에 주인공이 어떻게 되는데’라고 묻는 게 하등 이상할 게 없었고 그 물음에 친절하게 대답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오히려 결말을 묻지 않으면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건가’하고 섭섭한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스포일러가 아무렇지 않았던 건 과거 풍속에 기인한다. 당시엔 영화감상이 유일한 문화생활 중 하나였지만 영화관 수가 적어 극장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예매 제도가 없어 아무 때나 극장에 들어가 영화 뒷부분부터 보고 다음 회에 앞부분을 보고 중간에 나오는 식이었다. 스포일러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던 배경이다. 금전적인 문제도 있다. 영화 한편 보는 게 부담이 됐던 시절이었다. 

그런 무질서(?)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극장이 인천에 존재하고 있다. 동인천 앞 경동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애관(愛館)극장. 청일전쟁 중인 1895년에 건립됐으니 무려 125년이나 됐다. 당시 개항장이 있던 인천은 외국의 신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된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동인천 일대는 유행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 생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건립 당시 이름은 협률사(協律舍)였다.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해 돈을 벌어 인천으로 진출한 정치국이라는 사람이 세웠다고 한다. 원래 연극 전용관이었으나 1911년 축항사(築港舍)로 개칭한 뒤 1926년 ‘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화 상설관이 됐다. 이는 종로의 단성사보다 무려 12년, 최초의 국립극장인 원각사(1914년 소실)보다는 13년이 앞선 것이다. 

해방 후 애관은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소실돼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1960년 9월 재건축과 함께 지금의 애관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당시로선 400석의 큰 규모였으며 연 관람객 수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 

현재 주인은 1972년부터 극장을 운영했던 탁상덕의 장녀이다. 부친 사망 뒤 아들들이 운영하다 부도가 나 경매로 나온 것을 딸이 되찾았다.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현대화 됐지만 외관으로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들이 있다. 극장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나 ‘BOX OFFICE’라고 쓴 창구에서 표를 파는 것도 무인발매기나 인터넷 예매가 일반적인 요즘 멀티플렉스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극장 안의 로비나 매점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등에서 옛 극장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애관극장은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공연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미국의 번스타인이 내한공연을 했고 신성일·엄앵란 쇼가 열려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신작 영화가 인천에서 가장 먼저 상영됐고 이미자·나훈아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공연했다. ‘노란샤스의 사나이’로 유명한 가수 한명숙이 이곳에서 데뷔했고 배우 전무송이 애관극장 간판부에서 잠시 간판 칠을 했다. 

1990년대 중반 들어 구 시가지가 쇠락하고 현대적인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등장하면서 한때 존폐의 위기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요즘은 사업 다각화를 통해 다시 과거의 명성을 되찾아 간다.  

요즘 멀티플렉스라고 불리는 영화관들은 재벌회장 저택 지하에 만들어놓은 영화감상 공간처럼 화면도 작은데다 젊은 커플들이 쉼 없이 콜라와 팝콘을 먹어대는 바람에 영화에 오롯이 몰두하기가 힘들다. 여담이지만 젊은 층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상의 각종 쿠폰을 활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영화를 보는 반면 노인들은 그런 것에 익숙하지 못해 손해를 본다는 느낌도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를 미처 보지 못한 이들에게 엔딩 부분을 자랑스럽게 알려주는 일이 더 이상 환영 받지 못하는 세태가 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래저래 ‘아, 옛날이여’란 노래 소절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