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휴머니튜드 케어’를 아십니까? / 이호선
[백세시대 / 금요칼럼] ‘휴머니튜드 케어’를 아십니까? / 이호선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교수
  • 승인 2020.11.20 14:38
  • 호수 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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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교수

‘휴머니튜드 케어’는

 치매환자를 ‘인간’으로 대하며

 부드럽게 말하고 돌보는 것

 13개 국가에서 이를 도입한 결과

 기적과 같은 치료효과 보고돼

4년째 침대에만 누워있던 치매 환자가 휠체어에 앉을 수 있다면 어떨까? 가장 공격적인 환자라 누구도 가까이 가기 어렵던 환자가 일어서 감동의 고백을 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나이 들어가면서 ‘환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늙고 죽는 것, 여러분 생각은 어떠한가? 이런 기적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가장 쉽게 실현되기 시작했다. 

인간답게 살고 더 인간답게 죽고 싶은 게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고 사람처럼 대우받으며 나이 들어가는 것은 현대의 늙어가는 100+ 시대 인류에게 생애 소망이자 과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것은 어떤 것이고, 인간다운 삶과 죽음은 어떤 것일까? 고전(古典)은 우리에게 그것이 인간에 대한 ‘태도’라고 말하고 그 태도를 합한 값을 우리는 ‘휴머니즘’(Humanism)이라 불렀다. 이런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사람됨’과 ‘사람됨을 잃는’ 질병, 치매를 살피는 과정을 ‘휴머니튜드’(Humanitude)라 한다. 인간을 말하는 휴먼(Human)과 태도를 말하는 에티튜드(Attitude)를 합친 ‘휴머니튜드’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시선과 태도를 가리킨다. 이렇듯 최근 이러한 인간적 접근을 치매 치료에 활용하는 방식이 휴머니튜드 케어(Humanitude Care)다. 시선을 맞추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일어서게 하는 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현대인들은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치매 케어의 혁명이라지만, 사실은 이것은 돌봄의 기본이었다.

누구나 생각하고 꿈꾸는 돌봄의 모습이지만 아직은 실현되고 있지 않은 이 치료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일까? 프랑스 치매케어 전문가 이브 지네스트가 개발한 이 휴머니튜드 케어는 현재 미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스페인 등 세계 13개국이 도입하고 있다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걷지 못하던 환자들이 일어나 걷고 폭력적인 환자들을 온순하게 만들 수 있게 만드는 그 기적의 돌봄법은 치매 환자들의 구속띠를 풀고 주사를 멈추는 대신, 눈을 마주치고 등을 쓰다듬으며 시작된다. 공격성이 완화되고 몸의 호전이 시작되었고 신경안정제 사용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환자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화가 누그러들기 시작했으며, 구석방에 박혀 나오려 하지 않던 치매 환자는 운동장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휴머니튜드 케어를 시작해 이를 지속하고 있는 의료진들의 고백은 더욱 놀랍다. 그저 인간적으로 대했던 것이지 기적을 시작했던 것이 아니다! 인지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공격성이 나타난다는 이유로, 어찌해도 잘 알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 진행성 질환이라는 이유로 ‘관리’ 대상이었던 치매 환자들이 이제는 휴머니튜드 케어를 통해 ‘조우’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가능했던 일이고 당연했던 일들이, 병원이라는 ‘관리’ 속으로 들어가고 성과의 산도를 통과하며 돌보는 이들의 ‘불가피한 폭력’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비인간적 대우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큰 폭력이었던 것이다. 환자들의 공격은 비인간적 처우에 대한 방어였고, 환자들의 무기력은 비인간적 눈길에 대한 학습된 무기력이었을 지도 모른다. 

휴머니튜드 케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환자가 몸으로 진심을 기억할 때까지 노력도 필요하다. 긴 시간을 함께하며 살펴야 하기에 인력도 절실하다. 종사자들의 인식변화와 지속적인 교육과 지원은 말할 것 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환자와 가족, 의료진들과 공동체 모두의 동의 과정이 필요하고 선구자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성과들이 이어져야 한다. 이 중요하지만 힘겨운 과정들은 상당한 재원과 손길들도 필요하다. 알지만 망설여지는 이유일 수도 있다. 

치매 인구 75만명, 2024년이면 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제 이 100만 환자들을 위한 구속띠, 그리고 신경안정제를 준비할 것인지, 아니면 보고 말하고 만지는 돌봄의 기본을 준비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늙고 꺼져가는 생명에 대한 이러한 ‘치료의 사치’ 앞에 이 사회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서야 할 것이다.

사랑은 낭비라더라. 할 필요 없는 것까지 내어주는 것이기에 사치라고 하더라. 초고령사회를 턱밑에 두고 이 사회가 그 많은 노인의 삶을 ‘관리’할 것인지 아니면 ‘조우’할 것인지 결정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답의 방향은 반드시 ‘조우’를 향할 것이다. 그렇다면 ‘효’와 ‘사랑’, 그 거대한 인류의 온도를 만드는 군불을 시스템으로 때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고백컨대, 예쁘게 성장할 때도, 아름다움을 고백할 때도, 늙고 아파도 심지어 나 자신마저 잊어버리는 순간에도 가장 인간답고 싶다. 막을 수 없다는 그 치매에도 인간답고 싶다. 나를 잊은 순간에도 사랑을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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