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도시유적전시관 ‘한양의 家, 견평방 가옥’ 전, “조선 최고 번화가 ‘견평방’ 집값은 주변 시세의 3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한양의 家, 견평방 가옥’ 전, “조선 최고 번화가 ‘견평방’ 집값은 주변 시세의 3배”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11.20 15:00
  • 호수 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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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최고의 번화가였던 견평방의 가옥을 재현하는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당시 모습을 소개한다. 사진은 당시 가옥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수동집’.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최고의 번화가였던 견평방의 가옥을 재현하는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당시 모습을 소개한다. 사진은 당시 가옥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수동집’.

의금부 등 주요 관청과 상설시장 등 위치해 경제‧문화 가장 발달한 곳

‘군소가옥연접도형’, ‘금부동집’ 모형 등 통해 당시 가옥의 모습 재현

[백세시대=배성호기자] 1394년 11월 29일 한양부로 천도를 단행한 태조 이성계는 이듬해 한성부(조선왕조 수도의 행정구역)로 이름을 고치고 5부(五部, 중부·동부·서부·남부·북부) 52방(坊)으로 행정구역을 나눴다. 이중 중부 8방의 하나인 ‘견평방’은 의금부 등 여러 관청과 시전(조선 시대에 현재 종로를 중심으로 설치한 상설시장)이 위치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한양에서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했다. 

한양 최대 번화가였던 견평방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한양의 家, 견평방 가옥’ 전이 내년 5월 2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분관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위치한 지역은 조선시대 견평방으로 현재 종로구 청진동, 공평동, 인사동 일대이다. 특히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시전에 직접 거주하며 생업에 종사하거나 인근에 주거지를 마련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견평방 가옥을 통해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아본다. 

전시는 크게 4부로 구성됐다. 먼저 ‘1부 한양 중부 견평방’에서는 견평방의 지리적 위치에 따른 역사적인 특성에 대해 소개한다. 견평방은 의금부, 전의감 등 주요 관청, 순화궁 등 궁궐 관련 시설, 상업시설 시전행랑 등 다양한 성격의 시설이 복합적으로 있었다. 전시에서는 19세기 말 외국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 등으로 당시 견평방의 모습을 살펴본다.

이어지는 ‘2부 수도 한양의 가옥’에서는 조선의 수도가 된 한양에서 추진한 가옥 관련 정책을 들여다보는데 현재까지도 겪고 있는 주택난을 연상시켜 흥미롭게 다가온다. 조선시대에도 새로이 한양에 유입된 사람들의 주거지 마련 문제가 시급한 해결 과제였다. 조정에서는 가옥의 보급 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안정적인 주거지 마련에 힘썼다. 또한 불법가옥의 억제 등 무분별한 확장을 통제하기 위한 규제 정책도 적절히 시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양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이내 주거지가 부족해졌고 번화가였던 견평방의 경우 인근 지역보다 3~4배 비싸게 거래됐다. 

밀집도가 높아 주변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평방 가옥 거래 문서’.
밀집도가 높아 주변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평방 가옥 거래 문서’.

전시에서는 ‘견평방 가옥 거래 문서’ 등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한양에서 가옥 거래는 한성부에서 주로 담당했는데 매도자와 매수인이 거래를 한 후 이를 한성부에서 인증하는 증거로 입안 확인증을 발급해줬다. 또한 한양에서 거주할 집을 찾고 거래하는 과정에서 가쾌라고 하는 중개인이 활동하기도 했다. ‘건평방 가옥 거래 문서’ 등 고문서를 통해 이러한 주택 거래 모습을 상세히 보여준다.

‘3부 견평방 가옥’에서는 견평방 가옥의 특징에 대해 알아본다. 견평방에는 주변 시설에 종사하며 생업을 이어갔던 사람들의 가옥이 있었다. 견평방은 도성 내 다른 지역보다 비쌌기 때문에 소수의 양반층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일부 상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협소한 토지에 가옥을 지었다. 좁은 필지와 골목길을 따라 밀집도가 높게 배치됐고, 규모는 작았으나 전통한옥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요소와 특징을 잘 간직했다. 전시에서는 ‘군소가옥연접도형’을 통해 당시 밀집된 집의 흔적을 들여다본다. 

또 견평방에 있었던 가옥 중 ‘금부동집’, ‘수동집’ 등 특징적인 3곳을 선정해 모형으로 제작해 당시 가옥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한양의 가옥이 초가(草家) 비율이 높았던 반면 견평방 지역은 기와집 비율이 높았다. 이유는 상당수 주민들이 상업에 종사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경제력을 갖춰 값비싼 기와를 많이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전 혹은 전방이라고 하는 상업시설이 있었는데 전면에는 물건을 진열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판매 공간이 있었고 후면에는 가족의 주거공간이 있었다.

마지막 ‘4부 견평방 가옥의 흔적’에서는 해방 이후 견평방 일대의 변화과정과 가옥의 흔적에 대해 소개한다. 견평방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에 종로구의 청진동, 공평동, 인사동 등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심재개발을 위한 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종로-시전-피맛길-주택지’라는 도시구조가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음을 밝혀냈다. 다양한 가옥의 유구와 각종 유물이 발견됐고 견평방 사람들의 생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 토․일․공휴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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