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슬기로운 일상생활
[백세시대 금요칼럼] 슬기로운 일상생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1.01.04 10:54
  • 호수 7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전기 배선 문제로 집이 정전돼

물까지 안 나와 너무나 불편

수리 후 전기가 다시 들어오니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할 수가…

코로나 견딜 힘이 생겨난 듯

이 엄동설한에 전기랑 물이랑 모두가 끊겨버렸다. 돈을 안 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집 어딘가에 전기선이 잘못되었단다. 기술자 부르고 오고 고치고…. 다 합쳐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불편한 게 너무나 많았다.

오후 네 시. 시골엔 해가 빨리 지는지 창밖에 햇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으스스 한기만 돌기 시작한다. 보일러도 안 되고, 히터도 안 되고. 너무 추워서 옷을 입을 수 있는 만큼 챙겨 입고 만약을 위해 랜턴과 초까지 준비해 놓았다. 전기가 나가니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해왔던 물도 덩달아서  끊겼다. 물을 끌어 올리는 펌프가 작동을 멈췄기 때문이다. 

물이 나오지 않으니 화장실도 사용할 수가 없다. 사용금지라 하니깐 더 ‘당기는지’ 자꾸 화장실만 가고 싶어지고, 먹는 물이 모자라는 걸 아는지 뱃속에선 자꾸 물 달라고 아우성이고. 다행히 얼어 죽기 직전쯤에 전기는 들어왔지만, 그다음엔 또 물이 말썽이다. 물 퍼 올리는 펌프가 작동을 아예 안 한다. 수명을 다한 것 같다. 단골로 오시던 설비 기사가 2시간 거리에 있다 해서 기다리기로 했다. 딱 두 시간만 참자. 

나름 손 씻기도 버릇이 되었는가. 물이 나오지도 않는 수도꼭지에 손을 자꾸 내미는 걸 보니 코로나가 나름 우리에게 준 좋은 버릇도 있구나 싶다.

밖은 이미 사방이 깜깜하다. 철딱서니 없는 배는 상황이 이 처지인데도 속을 채워달라고 꼬르륵거리는데 음식을 만들 물은 고사하고 컵라면에 부어 먹을 물도 없다. 배가 고파 먹은 과자 때문에 입이 텁텁해서 귤을 한 조각 먹었더니 너무 달아서 또 물이 그리워진다.

어쨌거나.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전기도 물도 다 해결이 됐다.

아…. 이 순간. 너무도 행복하다. 따뜻한 온기가 쑥쑥 나오는 보일러랑 히터가 있고, 참지 않고 맘대로 화장실도 갈 수 있고, 씻고 싶은 만큼 씻을 수 있는 물도 콸콸, 맛난 것 맘껏 요리할 수 있는 물도 펑펑 나온다.

방마다 불도 환하게 켜고 TV도 틀었다. 홈쇼핑 채널이다. 물건이 다 동나기 전에 서둘러 구매하라고 재촉하는 저 사나이. 나로 하여금 정신없이 입금 버튼을 누르도록 유혹하는 저 남자. 그 남자가 바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이상하다. 열심히 설명하고 지지고 볶고 먹는 건 저 사람인데 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건가. 살아있다는 이런 기분, 참으로 오랜만이다. 

코로나19 이후로 처음이다. 예전엔 왜 몰랐을까. 전기와 물, 가장 기본적인 이런 일상적인 혜택이 내게 크나큰 행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들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누리고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잃고 나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하더니만 내게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망할 놈의 코로나19. 그놈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친구들이랑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며 웃던 그 웃음을. 밴드 연주를 통해 서로서로 오고 가는 거친 숨소리를. 뜨거운 한증막에서 몸을 지지고 나면 가뿐해지던 내 몸을. 한 번만 더를 외치며 열심히 운동하며 만들어 낸 땀에 젖은 얼룩진 운동복을. 팝콘에 콜라를 쥐고 계단을 살살 디디며 극장 좌석을 찾던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그동안 나는, 은퇴하고 나서 입만 열면 ‘내게 남은 일은 오직 여행뿐’이라 떠들어 댔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그 말을 한 후로 제대로 된 여행 한번 못 가봤다. 다 그 못된 코로나 탓이다. 예전이라면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닐 그저 일상적인 것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 같이 밥 먹고 여행가고 운동하고 전시장 가고 또 쇼핑가고. 사실은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것들이 모여 우리네 삶이 되는 것 아닌가. 

그동안은 이런 평범한 일상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너무도 당연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해야 할 게다. 조만간 우리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내게 이런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 주어진 것에 대해 늘 감사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겸손하게 살 것 같다.

당분간은 조금만 더,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머물라 한다. 그래도 새해인데, 참. 몸이 비비 뒤틀어진다. 캐럴도 없는 크리스마스도 보냈는데 이왕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자. 그래도 지금은 전기도 들어오고 따뜻한 물도 나오고 화장실도 맘껏 갈 수 있잖은가. 그것만도 고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