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인간 남편과 컴퓨터 남편 / 엄을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인간 남편과 컴퓨터 남편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1.03.05 14:40
  • 호수 7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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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미래를 다룬 어느 영화처럼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복제한 ‘컴퓨터 남편’ 만들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다 해도

얼마 안 가 싫증나고 말 것

꽤나 오래된 것 같다. 내가 미행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가졌던 때가. 이건 완전 미행 수준을 넘어 추적관찰이란 표현이 더 정확할 게다. 내가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많이 먹고 쇼핑은 어디서 주로 하고 자주 만나는 사람은 누구인지, 몇시에 자고 몇시에 일어나며 관심분야는 무엇이며 요즘 고민거리는 무엇인지까지.

TV를 틀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알려주고, 인터넷을 켜면 ‘당신이 좋아할 음식’, ‘당신이 반할 만한 멋쟁이 옷가게’, ‘이런 가게 어때요’, ‘이런 음식은?’ 핸드폰을 열면 ‘당신의 하루 평균 인터넷 검색 시간은’….

인터넷 검색 창엔 그동안 내가 궁금해서 알아봤던 그 모든 것이 널려 있고, 차를 타면 네비 검색 창에 ‘자주 가는 장소의 주소’가 주루룩 나와 있고, 가끔씩 산책하다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때면 어디선가 카메라가 눈을 게슴치레 뜨고 스르륵 나를 따라 움직이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땅속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는 이상, 내 동선은 기계 속에 모조리 저장된다고 보면 된다. 생각해보니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다. 하지만 컴퓨터의 이런 정보 저장 시스템이 사생활 침해라는 역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CCTV 추적을 통해 범인도 잡을 수 있고, 그가 사용했던 컴퓨터를 분석해서 범죄의 동기며 과정이나 공범도 찾아낼 수 있다.

지지난해였던가. 미국에서 참 신선한 영화를 한편 봤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영화다. 어느 30대 중반쯤 된 한 여자가 남편을 병으로 잃었다. 그를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는 그가 병을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와 똑같은 컴퓨터 인간 만들기를 준비했다.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를 이용하여 똑같은 인간을 만드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거다. 거기다가 남편이 죽기 전에 충분히 준비해 찍어둔 동영상을 통해 얼굴 표정이며 행동이며 걸음걸이, 목소리까지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도 하나도 어렵지 않을 터이고.

유명스타와 똑같이 만들어 놓은 ‘왁스 뮤지엄’에서 보듯이 겉모양을 카피하는 것도 일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탄생된 컴퓨터 남편. 이런 걸 AI라 하던가. 그녀는 병든 남편이 죽자마자 인간 남편을 땅속에 묻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날 밤부터 컴퓨터 남편이랑 동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너무도 애틋해서 매일매일 눈물 흘리며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 대하듯 감사해하며 즐겁게 지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 컴퓨터 남편이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부인이 말만하면 뭐든 다 해준다. 무거운 것도 거뜬하게 들어주고, 집안일도 척척, 정원일도 싹싹, 밤일도 씽씽. 지치지도 않고 뭐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다가 그녀는 주름이 늘어만 가는데 이 ‘기계남편’은 늙지도 않는다. 또한 입력된 정보에 따라 반응을 하기 때문에 모든 건 예측가능하고 어떤 돌출행동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다툴 일도 없다. 그런데. 사실 매력이라는 것이 그렇더라. 상대방이 예상을 빗나가는 엉뚱한 반응을 보여 마음을 가늠하기 헷갈릴 때. 이럴 때 매력이 ‘뿜뿜’ 솟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 컴퓨터 남편은 디지털 기계다. ‘0 아니면 1’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같고, 똑같은 상황에서는 똑같은 반응을 한다. 결국 영화는, 완벽하지만 인간냄새 나지 않는 컴퓨터 남편에게 실망을 한 이 여자가, 컴퓨터 남편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며칠 전, 안과질환이 있어서 서울에 있는 큰 대학병원을 다녀왔다. 새벽인데도 많은 환자들로 붐볐는데, 특히 부부로 보이는 노인 커플들이 많았다. 할머니는 실버카를 끌고 절뚝거리고,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질질 끌고. 누가 환자이고 누가 보호자인지. 얼핏 보기에는 둘 다 환자 같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할머니 실버카 위에 지팡이를 놓고 의사를 만나러 가는 걸 보니 할아버지가 환자이고 할머니가 보호자인가 보다. 나이 좀 더 들면 언젠가 우리 부부도, 적당히 아프고 대충은 지치고 여기저기 몸도 힘들 게다. 하지만 나는 실버카 끌고 남편은 지팡이 짚으며 산책도 병원도 꽃구경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다. 40년 이상을 서로 싸우고 토닥거리며 살면서 인간냄새 폴폴 풍겨 지루할 틈이 없는 인간남편이, 씽씽 활력 충만 지칠 줄 모르는 컴퓨터 남편보다 훨씬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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