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47] 생명이 오는 자리에서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47] 생명이 오는 자리에서
  •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승인 2021.04.23 13:32
  • 호수 7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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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오는 자리에서

폐병은 겨울이면 늘 심해져

차가운 밤 술잔도 들지 못하는데

한 자 넘게 눈이 온 걸 알자마자

생각이 감실 매화로 앞질러 가네.

마구간엔 말발굽 자주 또각거리고

창가 아이 코골이는 천둥 같은데

심지 밝혀 낡은 문에 눈을 붙인 채

한 생명이 예 왔는지 살펴본다네.

肺病冬常苦 (폐병동상고)

宵寒未御盃 (소한미어배)

已知盈尺雪 (이지영척설)

先念在龕梅 (선념재감매)

櫪馬蹄頻鼓 (력마제빈고)

窓童鼾卽雷 (창동한즉뢰)

心明眼故闔 (심명안고합)

點檢一生來 (점검일생래)

- 김시민(金時敏, 1681~1747), 『동포집(東圃集)』 권6 「한밤중 잠에서 깨어[夜半睡覺]」

이 시는 동포(東圃)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1739년 세밑거리에 쓴 작품이다. 수련(首聯)을 보면 작가는 겨울마다 기침으로 고생을 해왔던 모양이다. 그날 밤도 기침 때문에 잠을 깨고 말았다. 깨고 난 뒤 잠이 안 와 한 잔 술로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기침 때문에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억지 잠을 청할 수 없어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한 자 넘게 눈이 내렸다. 그런데 눈이 한 자 넘게 쌓인 걸 알자마자 시인은 불현듯 감실 매화 생각이 난다. 그래서 말도 발을 동동 구르는 지독한 추위 속에, 천진한 아이의 세상모르는 코골이를 뒤로 한 채, 시인은 매화를 찾아간다. 그리고는 등불을 찾아 불을 밝힌 뒤 행여 한기(寒氣)라도 스며들까 감실 문짝에 눈을 붙인다.

마지막 구의 ‘한 생명이 예 왔는지 점검한다[點檢一生來]’는 표현에는 매화의 개화를 바라보는 시인의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매화의 개화를 그저 감각적 향유대상의 개화가 아니라 ‘생명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다. 더구나 경련의 ‘말도 발굽을 자주 또각거릴 만큼’ 혹독한 추위에서라면, 매화의 개화는 더욱 신비롭고 외경(畏敬)스럽기 그지없는 생명 탄생의 순간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침으로 술잔도 들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한밤 지독한 추위를 무릅쓰고서 매화 감실에 눈을 붙여가며 천지간 비밀스러운 생명 탄생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문인들은 유별나게 매화를 사랑했다. 그 이유는 매화가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 가운데 하나여서기도 했지만, 그보다 매화는 현상적으로는 끊긴 것처럼 보였던 생명활동이 한겨울 지독한 추위 속에서도 쉼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하는, 하나의 특별한 매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조 문인들이 지은 수많은 매화시가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중략)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우리는 현저한 일상의 변화를 겪었고, 또 여전히 겪고 있다.(중략)

우리에게 주어진 이 낯설고 편치 않은 변화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일상의 주인인 ‘나’에 대한 적극적인 자각과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능동적 교감이다. 일상의 주인인 ‘나’가 나를 둘러싼 새로운 관계-그것이 어떤 대상과 어떤 형태로 재조직되더라도-에 대해, 주체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능동적으로 교감해나간다면, ‘나’는 새롭게 변화된 일상에서도 자족하고 풍요로운 일상의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출처: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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