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보물들이 여기 다 모여 있네”
[백세시대 / 세상읽기] “보물들이 여기 다 모여 있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1.04.23 14:15
  • 호수 76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사·고대관, 중·근세관, 기증관 등 6개의 관과 50개의 실로 구성된 상설전시장에 총 1만2044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지난주 토요일 오후 1시 30분, 이 박물관 현관 입구에서 코로나 열 체크를 하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제지당했다. 남자직원이 “기존 입장객들이 빠지는 대로 들어가기 때문에 오후 3시에 (입실이)가능하다”고 했다. 이미 몇 차례 와봤던 전시실이라 한가롭게 기다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박물관 벽면을 따라 용산가족공원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띄엄띄엄 잔디밭에 서 있는 탑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섬세하고 우아한 스타일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흥법사 진공대사 탑(보물 365호)의 정교한 조각에 말을 잃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사진을 찍었다. 원통형의 기단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용무늬가 화려했다. 탑의 상층부 팔각형의 한옥지붕 위에 다시 8각형의 옥개(屋蓋)를 얹어 장중함을 더했다. 신라 신덕왕과 고려 태조의 왕사를 지낸 진공대사 충담(869 ~940년)의 묘탑이다.

탑의 상층부와 기단석을 둥그런 돌로 이어놓은 충주 정토사 흥법국사탑(국보 102호), 순박하면서도 위엄이 가득한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보물 190호), 돌을 플라스틱처럼 정교하게 다듬고 쌓은 현화사 석등 등이 눈길을 끈다. 

전통염료식물원 팻말이 보였다. 조상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채취하던 쪽·꼭두서니·여뀌 등의 염료식물이 자라고 있다. 개화 전이라 볼품이 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다양한 탑과 불상을 전시한 석조물정원으로 향했다. 커다란 종각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높이 318cm의 거무튀튀한 쇳덩이가 웅장하다. 한양의 대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던 보신각종(1468년·보물 2호)이다. 그렇다면 ‘제야의 종’ 종로 보신각종은 ‘짝퉁’인가. 

보신각종 주변은 대나무 숲이다. 이곳이 용산 시내 한복판임에도 바람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잘 가꿔진 숲속 한 켠 데크에 자그만 책장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책장 안에는 30여권의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도서까지 마련해놓은 배려에 감동해 책장 유리문을 열고 책 한권을 꺼내들었지만 하필이면 손에 잡힌 책이 일본의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분노’라니….

오솔길을 따라 걷자 진품명품의 석탑, 석등, 석불이 전시돼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김천 길항사 동서 삼층석탑(국보 99호), 고달사 쌍사자 석등(보물 288호),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보물 358호) 등. 그 중 기자가 거주하는 서울 지하철 홍제역 부근에 있던 사현사란 절에서 가져다놓은 오층석탑이 흥미로웠다. 탑의 석재들이 시루떡처럼 넙적하고 처져 있었다. 사현사는 고려 종정 11년(1045년)에 지금의 유진상가 자리에 창건됐다고 한다.   

석조물정원 옆에 거대한 4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었다. 국립한글박물관이다. 입구에 세워놓은 시멘트 구조물에 조선시대 한글편지를 전시해놓았다. 그 중에는 중종이 조모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이 박물관 역시 예약을 안했다면 2시간 후에나 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다. 내부도 구경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꽃잎이 떠 있는 모란못 위를 가로지르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 숲을 벗어나면 연못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박물관 모습이 커다란 못에 비친다고 해서 ‘거울못’이라고 명명했다. 모래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 물속에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못 주변 벤치엔 가족과 연인, 노인들이 한가로이 봄 햇살을 쬐고 있었다. 거울못을 내려다보는 청자정에 올라 박물관 광장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남산 N타워가 건물 중앙에 직사각형으로 뚫린 사이로 선명히 보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전시실 1층에 있는 한식당의 비빔밥이 먹고 싶을 때, 볼만한 특별전시가 있을 때 몇 번 찾았던 곳이다. 그렇지만 이번에 숲속에 가려진 야외공원과 호젓한 쉼터를 처음 발견하곤 놀랐다. 3시간여에 걸친 정원 산책과 석조물 감상은 박물관 전시유물 관람 못지않은 충만·행복감을 안겨주었다.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석탑, 석불, 문인석, 석등에 관심 있거나, 또는 심신이 지쳤을 때 꼭 한번 방문할 곳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