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코로나의 추억 / 엄을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코로나의 추억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1.05.07 14:40
  • 호수 7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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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네 살 큰 손녀는 

음료수 마실 때도 마스크 안 벗고

갓 태어난 둘째 손녀도 

신생아용 마스크 쓰고 병원 가

그래도, 무럭무럭 잘 자랐으면…

전쟁으로 입은 상처는 참으로 오래가는 것 같다. 육체에 남겨진 상흔이야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만 머릿속에 남겨진 상흔은 잘 보이지도 않아 치료하기도 힘들고 겉으로는 멀쩡해서 남들에게 동정조차 받지 못한다.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내 큰딸 직장 동료의 가까운 친척이라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그리운 가족 품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귀에서 총소리가 난다며 괴로워하더니 끝내 자살하고 말았단다.

하긴, 여기저기 친구가 죽어 나가고, 또 옆 사람의 잘려나간 꿈틀대는 피투성이 팔다리를 보고도 멀쩡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듯싶다.

코로나 사태. 이건 전쟁이다. 총도 없이 싸우는 세균과의 전쟁이다. 이 작은 균 하나가 지구 구석구석을 모조리 뒤집어놓고 세상 사람 모두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다.

올해 1월, 코로나 환자가 세계 1위였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은딸이 서울로 돌아왔다. 예정일을 한 달 남겨놓은 만삭의 몸으로 네 살배기 딸 손을 잡고는 내 품에 왔다. 점점 번져가는 미국에서의 코로나 상황이 무서워서 몸을 풀러 엄마 품으로 온 것이다.

마스크를 겹겹이 쓰고도 무서워서 비행기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단다. 또한 화장실 가기가 두려워 성인 기저귀를 하고 한국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의사도 만나지 못한 채 2주간 자가격리까지 했다.

어쨌거나 고맙게도 지금은 순산해서 예쁜 딸을 낳아 두 딸의 엄마가 되어 같이 지내며 몸조리 중이다. 갓난아기는 내 딸인 아기엄마가 보고, 난 큰손녀를 데리고 발레스쿨이며 미술학원을 데리고 다니는데, 딸한테 코로나 교육을 참 똘똘하게도 시켰더라.

마스크 벗고는 일절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스크 아래로 빨대 꽂아 마시고 낯선 사람을 보면 가까이 가지 않고, 친구가 집으로 초대를 해도 위험하다며 거절한다. 

옳은 행동이지만 저러다가 사회생활에 문제는 없을지 걱정했더니, 요즘 애들이 다들 저렇게 조심스럽단다.

발레스쿨을 갔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투투(발레복)를 잘 차려입고서는 하나같이 입에는 마스크를 썼다. 웃음이 나왔지만 웃기에는 너무 슬펐다. 이럴 때 ‘웃프다’라고 하던가. 대사 없이 몸짓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팬터마임’ 같다.

미술반 애들도 똑같다. 마스크 쓰고도 할 짓은 다 한다. 말하고 그림도 그리고 찰흙으로 만들고 마스크 밑으로 빨대를 쑤셔 넣어 주스도 마시고. 서너 살 먹은 애들 인생의 반은 마스크를 쓰고 살고 있으니 습관이 되었나 별로 불편한 줄도 모르는 거 같다. 다행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우나도 마스크 쓰고 하려나. 찜질방에서는? 냉탕, 온탕에서도? 발가벗고 마스크만 쓴 모습을 상상해봤다. 발가벗고 넥타이만 맨 모습보다 더 우스꽝스럽다. 아니 더 ‘웃프다’. 

저 아이들이 다 자라면 마스크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남을까? 그저 외출할 때 신는 신발 같은 필수품? 낯선 사람을 만나면 코로나 보균자가 아닐까 거리부터 두는 버릇. 최소한의 만남 이외에는 집에서 머무는 게 최선이라는 ‘집콕 우선주의’. 콩 반쪽이라도 나눠 먹을라치면 옮겨질지도 모르는 병균에 대한 두려움.

이 애들이 연애할 나이가 되기 전에 마스크는 벗겠지. 그래도 첫 만남인 소개팅에서는 불안해서 습관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하려나. 둘이 주고받는 최고의 선물은 명품 마스크? 마스크 쓰고도 아름다운 사람이 최고의 미인?

엊그제 태어난 갓난아기 예방주사 맞으러 가는 날, 그 새끼손톱만한 입술 위에도 어김없이 마스크는 얹혀 있었다. 세상에나. 신생아용 마스크까지 있을 줄이야. 어릴 때 겪은 코로나의 기억이 인성 교육에 많은 영향이 있을 터인데 걱정이다. 

지난 식목일,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우울해 정원에 꽃이라도 심자 싶어서 꽃집에 갔다. 온실에서 키워낸 깨끗한 라일락 한그루를 샀는데 만 원을 덤으로 내고 진달래까지 가져왔다. 

“만 원만 더 주시고 이 진달래 가져가세요. 마른 땅에 버려진 폐타이어 안에서 자랐는데 물 잘 주고 잘 키우면 잘 자랄 것입니다”라던 사장님 말씀대로 그 진달래는 온실 라일락보다 더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

마른 땅 폐타이어에 갇혀 지낸 저 진달래와 같이 전쟁 같은 코로나 환경에 갇혀있는 우리 아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근심, 걱정 없이 자란 온실 라일락보다 너희들이 더 예쁘고 더 건강하게 자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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